한국어와 일본어가 표현하는 언어의 세계 - 우리는 왜 외국어를 배우는가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눈앞의 뜻모를 글자를 더듬거리며 읽는 일 이상으로, 훨씬 아득하게 펼쳐진 모험과도 같다.
모국어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명확하고 깔끔한 단어가, 외국어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딱 들어맞는 어휘를 찾을 수 없을 때의 난감함. 반대로 외국어를 쓰는 화자들이 오랜 시간 쌓아올린 문화와 생활의 결정체가 모국어에는 존재하지 않아 방황할 때, 이 과정이야말로 외국어를 배우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언어는 그 사회의 문화와 생각을 반영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바로 이때 진가를 발휘한다.
나는 20년 넘게 일본어를 배워왔고,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밥벌이의 도구이자 나의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해준 외국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를 공부할수록 내 한국어 실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고 한국어라는 언어가 얼마나 한국인의 삶과 역사를 담아내기에 알맞은 그릇인지 매 순간 깨닫게 된다.
‘코딱지’라는 단어가 그랬다.
우리 몸은 매일 여러 부위에서 분비물을 만들어낸다. 코에 들어온 더러운 먼지는 코털이 재빠르게 걸러내 ‘코딱지’를 만든다. 물기를 머금으면 ‘콧물’이 되는 이 분비물은, 접미어 ‘딱지’를 친구 삼았다. 상처가 났을 때 피가 멈추며 딱딱하게 굳은 자국인 ‘딱지’는, 코딱지의 질감과 형태를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꼭 닮았다.
코를 꽉 막고 있던 커다란 코딱지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의 시원한 쾌감, 피와 각질이 엉겨붙은 상처 딱지를 굳이 통증을 참아가며 조심스레 떼냈을 때의 상쾌함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일본에서는 코딱지를 ‘하나쿠소(鼻くそ, 코똥)’라고 부른다. ‘쿠소’를 단독으로 사용하면 ‘똥’이라는 뜻인데, 욕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일본에서는 최고 수위의 욕으로 여겨진다. ‘똥 먹어라’가 일본인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분노의 말이라니, 똥이야말로 일본 문화에서 더러움과 모욕의 상징인 셈이다. 일본인에게 코딱지는 그저 코에 붙어 있는 더러운 분비물일 뿐이다.
눈곱과 귀팝은 또 어떨까.
우리말의 ‘눈곱’은 눈에서 나온 ‘곱’이다. 곱이란 ‘곱창’에서 알 수 있듯 기름지고 끈적한 것을 일컫는다. 눈에서 나온 더러운 분비물이 마치 곱처럼 흘러내리고 기름진 모습이라 ‘눈곱’이 된 것은 아닐까.
‘귀팝’에 이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지역에 따라 ‘귀밥’, ‘귀지’ 등 다양한 표현이 쓰이는데, 멋대로 하는 추측이지만 ‘귀팝’ 혹은 ‘귀밥’은 ‘귀에서 나온 밥’에서 비롯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눕혀놓고 조그만 귀를 조심스럽게 청소하다 보면, 노랗고 하얀 가루 모양의 귀지가 수북이 쌓인다. 이렇게 작은 귀에 도대체 어디에 그 많은 것이 들어 있었나 싶어, ‘이러니 엄마 말이 안 들렸지’ 하며 아이의 귀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겨본다.
휴지 위에 수북이 쌓인 귀지는 꼭 고봉밥 같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귀지 대신 밥이라도 이렇게 많았으면 좋겠다는 한탄과 염원이 담겨 ‘귀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아닐까.
이렇듯 우리말은 눈, 코, 귀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각기 다르다.
이에 비해 일본어에서는 눈곱도, 코딱지도, 귀지도 모두 ‘쿠소’라는 접미어가 붙는다. 직역하자면 눈똥, 코똥, 귀똥이다. 일본어에서는 이것들을 굳이 모양이나 형태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전부 그저 더러운 ‘똥’일 뿐이다. 그래서 일본인 친구들은 한국어로 된 분비물 표현을 공부할 때, 복잡한 구분이 붙는다고 어려워했다.
이런 단어들을 발견할 때마다, 외국어를 배우는 진짜 재미는 오히려 모국어의 참신함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는 눈이나 비를 표현하는 단어가 한국어보다 훨씬 풍부하다. 습하고 비가 잦은 열도의 날씨 특성 때문인지, 비가 내리는 모습이나 시간대, 계절별로 다양한 단어가 존재한다.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어휘도 한국어보다 섬세하고 폭이 넓다.
불편하거나 어색한 분위기, 외로움을 표현하는 단어도 한국어보다 훨씬 다양하게 나뉘어 있지만, 책만 읽어서는 그 단어마다 담긴 미묘한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기 어렵다. 이런 단어들은 일본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의 삶과 감정, 공기의 결을 압축해 만든 표현들일 것이다.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미리 짜놓은 언어의 틀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또 다른 생각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고 호흡하는 일이라고 느낀다.
AI의 발전 덕분에 이제는 외국어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나 역시 현업에서 AI를 다루며 그 속도와 효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여전히 완벽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문화와 개념의 장벽이다. 그리고 이 장벽을 부수고 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앞으로도 그렇게 모국어와 외국어를 넘나들며 아주 조금씩 세계를 넓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