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보통 10시 반쯤 잠에 든다.
10시 반이 되면 아이와 침대로 가서 나는 책을 읽어준다.
어릴 때 밤마다 그림책을 함께 읽는 시간이 여전히 계속돼서 지금은 글 밥 많은 책들을 읽어준다.
요즘 한참 읽어주고 있는 책은 '톰소여의 모험'이다.
읽어주는 책은 주로 내가 선별하는 편인데, 내가 어릴 적 재밌게 읽었던 이야기에서 많이 가져온다.
톰소여 전에는 '작은 아씨들'을 읽어주었고, 그전에는 '에밀과 탐정'이란 책과 해리포터 책을, (해리 포터는 불의 잔 시리즈까지 읽다가 불사조 기사단까지는 못 넘어갔다), 그리고 그전에는 '영국 이야기', '인도 이야기' 같은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은 30년도 더 된 어릴 적 내가 읽었던 책이다. 엄마가 내게 처음으로 사준 계몽사 전집이었는데, 그 책이 여태껏 친정집에 있어서 작년에 몇 권 가져와서 읽어준 거다. 한참의 시간을 다시 보는 어릴 적 동화책이라니, 읽어주는 나도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그렇게 매일 밤 10시 반이 되면 아이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나의 책 소리를 듣는다.
책을 읽어줄 때 규칙은 바로 눈을 감는 것.
어쨌든 지금은 자야 하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눈을 감고 듣다 보면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그 시간을 즐기기를 바라서다.
나는 딱히 목소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30분쯤 책을 읽어주다 보면 내 목이 잠겨서 점점 더 저음이 되기도 하지만,
그 시간은 아이에겐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 여행이 되기도 하고, 나에게는 어릴 적 내가 좋아했던 책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기도 해서, 목은 좀 힘들지만 즐거운 시간이다.
어릴 적 나는 모험 이야기를 좋아했다. 지금은 세상 소심한 쫄보가 되었지만 어릴 적 그때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 이야기를 참 좋아했더랬다.
얼마 전에 읽어준 에밀과 탐정이란 책은 책 속에서 범인이었던 '그룬트 아이스'라는 이름을 30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이야기책의 대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릴 적 엄마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책의 이야기가 아이 안에 오래오래 남았으면 해서 매일 밤 가끔은 버겁기도 하지만, 꾸준히 책을 읽어준다.
어젯밤엔 톰소여의 모험을 전자책으로 읽어주는데, 와~ 이게 이렇게 길었던가? 688페이지나 된다. 며칠째 읽어주고 있는데 이제 455페이지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늘도 책 속으로 모험을 시작한다.
오늘의 이야기는 톰과 친구 헉이 그냥 있다고 믿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보물을 찾기 위해 근처 이곳저곳을 냅다 삽질하는 내용이다. ^^
'한밤중 그림자가 드리우는 고목 가지 끝 바로 밑 땅속'의 그런 문학적인 어딘가에 묻힌 썩은 상자 같은 걸 찾고 있는 중이다.
이 한밤중에 삽질로 유령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이 소설의 또 한 번의 클라이맥스가 나온다.
톰이 목격했던 살인 사건의 범인인 인전 조를 재회하게 되는 곳.
혹시 톰소여의 모험을 읽은 분이라는 기억하실는지 ^^
두근두근 얘길 듣고 있던 딸아이가 갑자기 무서운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얘기해 주겠다며 벌떡 일어난다.
이런 날은 뭔가 막 얘기가 하고 싶어지는 날인 게다.
딸아이가 요즘 한참 재밌어하는 로블록스 게임에서의 괴담 '게스트 666'이라는 이야기다.
'게스트 666'으로 시작된 그날 밤 우리의 수다는 어떻게 되었는지 상상이 되는지.
함께 본 친구의 이야기, 그리고 또 다른 친구에 대한 걱정, 1년 전 있었던 친구와의 다툼, 친구에 대하여, 그리고 인기 있는 친구, 매력에 대하여, 목소리, 발성까지.
그날 우리는 밤 1시가 되도록 수다가 계속되었다.
딸아이는 평소엔 그렇게 마음속 깊은 얘길 잘 안 하는 편이다. 10살이 되고부터는 세상 쿨해져서 학교에서 자랑할 만한 일이 있어도, 재밌는 일이 있어도 딱히 얘길 않는다. 다행히 마음이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털어놓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싶긴 하지만, 학교에서 부반장이 되었을 때도 그날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며칠 지나서야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
맨날 궁금한 엄마만 학교에 갔다 올 때면 물어보게 되는 거다.
"오늘 어땠어?"
"수업은 재밌었어?"
"쉬는 시간에 친구들하고 무슨 얘기 해?"
그 모든 질문에, "별일 없었어"로 퉁치는 쿨한 그녀.
그런 딸아이가, 가끔씩 이렇게 밤에 나의 책 소리를 듣다가 수다가 터지는 날이 있다.
어릴 적이랑 똑같다.
5살 때 침대에서 쫑알쫑알 얘기하던 우리들의 수다는 아직도 내 핸드폰 음성녹음 폴더에 담겨 있다.
어릴 적에는 지금보다 더 신나서, 침대에서 한밤중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가끔은 자작 시를 읊어주기도 했다.
그때 그 목소리, 그 이야기를 담아주고 싶어서, 뭔가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하면 나는 슬쩍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켜곤 했다.
가끔씩 그때 녹음된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어릴 적 딸아이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그런데 오늘은 깜빡 잊고 핸드폰 녹음 버튼을 누르는 걸 잊어버렸다.
나도 같이 수다에 빠져버리다 생각을 못 한 것.
잠깐 괴담 얘기하다 말 줄 알았지, 이렇게 2시간이나 이어질 줄 생각을 못 했으니 말이다.
한밤중 2시간의 아이의 달뜬 목소리를 남겨두지 못한 건 너무 아쉽지만, 이렇게 긴 수다를 딸아이와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조금 힘들더라도
역시 밤에 듣는 책 소리는 역시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 mumurae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