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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나 Sep 05. 2020

높고 선선한 가을에는, 키스자렛

음악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실황(1975. 01. 24)

Keith Jarrett <The Köln Concert>



최악의 상황에서 태어난 최고의 명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키스자렛의 쾰른콘서트 실황 라이브 음반은 솔로 피아노 곡 중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음반이다. 총 두 파트로 구성되는데, part II는 길이가 길어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녹음되었다. 총 1시간이 넘는 길이이다.


part 1_ 26:02

part 2a_ 14:54

part 2b_ 18:13

part 2c_ 6:59


  아, 정말 아름답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즉흥으로 연주되고 그 자리에서 녹음되었다고 한다. 탄생비화는 이 음반의 아름다움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낸다. 1975년 1월 24일 당시 유럽 투어라는 무리한 공연 일정 때문에 지쳐있던 키스자렛에겐 쾰른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이 예정되어있었다. 그러나, 오페라하우스 측의 착오로 그가 사전에 부탁한 대형 그랜드피아노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찌저찌해서 성능이 떨어지는 피아노 한 대만 겨우 구해진 상황이었다. 당시 해당 공연 PD였던 17세 소녀는 공연 당일까지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망연자실했다. 이미 1400명의 관객들로 전석 매진된 상황이었고, 피아노 상태를 본 키스자렛은 해당 피아노로 도저히 공연을 할 수 없다며 돌아서서 차에 탔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어린 PD는 빗 속에서 이 29세의 천재 피아니스트에게 울며 부탁했고, 마음이 약해진 그는 다시 돌아가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기준 미달인 피아노를 앞에 두고 연주자는 연주를 시작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음계를 피해 즉흥 연주곡을 연주해야만 했다. 1400명의 관객은 평생 남을 명반의 탄생을 목도할 줄도 모르고 숨을 삼켰다. 키스자렛이 연주를 시작하고, 점점 그 연주에 매료되어갔다. 중간중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추임새, 흥에 취한 신음소리, 건반 소리가 약해서 강하게 쳐내리는 연주음, 그리고 적절한 순간들마다 터져나오는 피아노를 쿵쿵 두드리는 소리는 공연장에 있던 전부를 그 순간에 몰입시켰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가 흥분에 빠져 피아노 속으로 녹아드는 모습, 그리고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흠뻑 젖은채, 어떤 마음으로 그 장면을 감각하고 있었을까. 


당시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즉흥으로 연주곡을 끝마친 그에 대한 찬사는 끝이 나질 않는 박수소리로 터져나왔다. ECM이 라이브로 녹음한 그 곡은 현재까지 4백만 장이 넘는 판매를 보이고 있으며, 피아노 앨범 중 최다 판매량이다.



가장 사랑하는 part I과 세 구간



가을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면, 이 곡과 가장 닮아있지 않을까


피아노와 하나가 된 키스 자렛


  나는 특히 part I 을 가장 좋아하는데, 6:00에서부터 이어지는 고조되는 구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고는 한다.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쿵쿵소리와 키스자렛의 희미한 신음소리, 그리고 추임새들을 들으면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7:10부터 이 연주는 본격적으로 고조되기 시작한다. 강물이 몰아치는 듯한 장면과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나무 사이에 혼자 앉은 사람, 세찬 바람 앞에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리지만 눈 감은 그의 얼굴만은 누구보다 평온한 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내면은 흥분과 자신의 삶에 대한 설렘으로 고조되어있고, 바람은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세차게 불어 제끼고 그는 그 흥분을 고스란히 느낀다.


이후 9:50 부터 두번째 고조됨이 밀려온다. 전 것보다 좀더 경쾌하며 높고, 점점 깊이있는 몰입으로 빠져드는 구간. 중간중간 키스자렛의 터져나오는 추임새도 선율을 더 고조시킨다. 그리고 다시 사그라들어서 본래 톤으로 돌아오는가 했다가 다시 고조되기를 반복. 마치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이 피아노로부터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빠져든다. 피아노가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건반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쉰다. 다같이 모여 경쾌하게 춤을 춘다. 키스자렛은 어떤 곡을 연주하든 피아노의 이야기를 본인이 손가락을 통해 대신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충만한 생명력을 분출해낸다. 그의 손 끝으로부터 청량함, 그리고 시원하다 못해 순수함이 바깥으로 흐르고 그 내면에는 강인함과 고고함이 여유롭게 존재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 곡은, 선선하고 서늘한 가을과 결이 같다. 그래서 요즘 같이 가을이 느껴지는 날에 꼭 한번씩은 꺼내어서 종일 듣는 것이다. 또다시 20:10에서부터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앞서 소개한 두 구간과 합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냥, 아,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두 팔에 전율이 일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온 몸에 시원한 가을이 깃들고 미래에 대한 낙관이 내 안을 충만함으로 채운다. 긴장이 풀리고 이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두 귀를 흠뻑 담군다. 모든 소리, 냄새, 온도, 숨 모든 것들이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눈을 감으면 살아 숨쉬는 선율이 보일듯하다. 그 가운데 녹아들어있는 키스자렛의 탄성은 이 곡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선율은 점점 고조되어가며, 아름다움과 천상의 빛들을 품어내고서 part I 은 결말로 다가선다.



아름다운 음악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이 완벽한 멜로디를 즉흥으로 연주했다니, 이 아름다운 변주의 반복을 순간적으로 떠올려낸 것이라니, 존경스럽다. 경이롭다. 정말 키스 자렛의 모든 숨 하나하나가 음계와 어우러졌음을 이해하게 만드는 곡이다. 예술가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곡들을 들려주어서, 결코 알지 못할 감각들을 느끼게 해주어서 감사하다.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살아있는 감각을 느껴낼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내 자신에게도 고맙다. 이 존재하는 아름다움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들을 안고 나도 잘 살아봐야지, 잘 살아내야지, 다짐한다.



그래서 오늘 같은 가을 날엔 키스 자렛을 들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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