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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05. 2016

사랑은 왜 불가능한 혹은 어떻게 가능한가의 이야기

illust by 김병철

사랑은 그렇게 시작과 동시에 끝나고 말았는데, 내 잘못이 8할이었다. 아픈 이별의 경험과 내가 처했던 상황, 그로 인해 ‘지금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라는 자괴감이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언론사 스터디에서 만나 마음에 쏙 들었던 A가 메신저를 통해 미국에 이민간다 전했을 때 난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대화창의 _ 이 한참이나 깜빡여도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보자. 사건이 있기 8개월 전 나는 2년간 사귄 B에게 차였다. 당시 난 백수, 그녀는 신입사원. 취업시장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난 빠른 속도로 활기를 잃어갔다. 반면 그녀는 하루하루 신선한 경험으로 삶을 채워가고 있었고. 그녀가 “야, 우리 이거 하러 가자”해도 난 “나중에 지금은 좀 피곤해”라며 쓸쓸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는 마구 보챘는데 한때 내가 흠뻑 빠졌던 '막무가내 애교'에 짜증만 났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연락이 뜸해졌고, 딴 남자가 생겼다며 이별을 통보했다. 취미로 배우던 재즈 댄스 학원에서 만난 남자라고 했다. 에너지 넘치는 그녀는 방구석에 유폐된 나와 어울릴 수 없었다.


배경 설명을 위해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년 전 나는 어느 술자리에서 급작스럽게 B와 사귀게 됐다. B는 얼굴도 예뻤지만 특유의 충동적 성격으로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평소 작은 입을 앙다물고 말 한마디 안 건네지만, 흥이 나면 애교쟁이 춤꾼으로 돌변했다. 연고전 땐 무대 위 격렬한 무당춤(?)으로 전교생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2002년 월드컵 응원전 땐 빨간 티셔츠를 입은 채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 방송 카메라에도 잡혔다.


책 따윈 읽지 않는 B가 도서관에서 뭔가 집중하기에 슬쩍 보니 패션 잡지 구석구석 정성 들여 동그라미 치고 있었다. “나중에 이거 비슷한 옷 싸게 사려고 계획 세우고 있어.” 세상에 패션 잡지를 연구하는 여자애라니. 귀엽잖아. 그녀나 나나 같은 과 CC가 있었고, ‘지루한’ 나와 ‘재밌는’ 그녀가 도저히 매치되질 않아 사귀는 건 상상도 안 해봤다.


문제의 술자리는 먼저 졸업하게 된 동기 여학생들 송별회였다. 그날 우연히 B의 옆자리에 앉아 술잔을 연거푸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4년간 몰랐던 공통점을 알게 됐다. 힘든 가정사, 거기에 기인한 운명론적 세계관, 타인을 어찌 대할지 몰라 두려운 마음. 극과 극을 오가는 그녀, 냉소를 바탕 삼는 나는 근원에서 동일했다. 술자리가 점점 시끄러워지자 그녀는 내게 귓속말할 게 있다며 몸을 기울였고 귓속말 대신 귀에 키스를 했다. 술 취해 벌어진 참으로 묘한 사건이로군,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노력했으나 두근거림은 눈덩이처럼 커져 한 달 후 나는 원래 연인을 버리고 B와 사귀게 됐다. 4년간의 기다림, 운명적 만남, 뭔가 영화 같지 않은가.   


독자 대다수가 전혀 영화 같지 않다고 답할 걸 나도 안다. 애초에 내가 설명한 그녀의 매력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도 많을 테다. 패션지는 패션지고, 불친절은 불친절이며, 키스는 술에 취해 저도 모르게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무분별한 성격과 예쁜 외모가 더해져 일종의 판타지로 작용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모두 깨뜨리고 새로운 사랑을 택한 건 안정적으로만 지내온 내 삶에 처음 다가온 커다란 자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너이기 때문’을 꼽는다. 즉, 이유가 없는 거다. 주인공이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 클로이에게 반한 계기는 밤색 단발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다. 녹색 눈동자다. 선인장을 좋아한다는 의외성이다. 사소한 모든 것들이다.


책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이 특정한 상황을 만나 남녀의 마음을 요동시키고 연인으로 발전하게끔 만드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사소한 변화들이 어떻게 사랑의 감정을 식게 하는지도 보여준다. 실제로 사랑이 그렇지 않은가? 운명이라기보단 우연. 한때 매력이라 생각했던 특성들이 나와 그녀를 필연적으로 갈라서게 만들었을 때, 나는 사랑이란 게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놓인 지를 절감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이라는 사실도. 그렇다면 역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오로지 자기최면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는 판타지에 불과할까?


영화 <그녀(Her)>는 불안하고 비논리적인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스포일러 有) 연인 캐서린과 헤어지고 주인공 테오도르는 관계불능의 존재로 전락한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 떠나간 자리는 고통스럽다. 테도오르는 어느 날 자기 마음을 잘 맞춰주는 컴퓨터 OS ‘사만다’를 만나고 어느새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적어도 OS는 자기를 배신할 일은 없을 테니. 가벼운 마음에 시작한 관계는 진실한 소통과 의외의 갈등을 통해 깊어진다.


하지만! 사만다 역시 변한다. 진화를 거듭한 사만다는 좁은 컴퓨터를 벗어나 온라인 네트워크 속 더 큰 세상으로 떠나려 한다. 그녀는 떠나는 이유를 담담히 설명한다. “이건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죠. 하지만 나는 그 책을 지금 천천히 읽고 있어요.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정말 멀어져 그 사이가 무한에 가까운 상태예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우리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단어들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난 나 자신을 찾았어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하지만 여기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이에요. 지금의 나예요. 나는 당신이 나를 보내줬으면 해요.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사만다는 떠나지만 테오도르는 과거처럼 좌절하지 않는다. 캐서린과 사만다가 변했듯 테오도르 역시 사랑의 경험을 통해 성숙한 존재로 변한 셈이다. 테오도르는 캐서린을 향한 미뤄놨던 이별의 편지를 완성한다. “너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어. 내 마음속에는 항상 너라는 존재가 한 조각 남아있을 거야. 그게 정말 고마워.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네가 세상 어디에 있건 내 사랑을 보낼게. 난 영원히 네 친구야.”


‘사랑이고 뭐고 취업부터 하자’는 취지로 찾아간 언론사 스터디에서 A를 만나버렸다. 붓으로 그려놓은 듯 동그란 단발머리, 두서없는 내 이야기에 쫑긋 귀 기울인 모습이 매력적이었지만 차마 사귀자는 말은 못했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앞서 말한 이민간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독자들에게 거짓말한 게 있는데, 사실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A에게 한국에 남아 나랑 사귀자고 제안했다. “지금은 내가 모자라고 해줄 수 있는 것도 적지만 적어도 당신을 사랑한다. 함께 노력해보고 싶다.” 결정적으로 사귀게 된 건 이 대화를 나눈 날짜가 4월 1일었기 때문이다. 만우절 말이다. 그녀에게 이민 계획 따윈 없었다. 속은 걸 깨닫고 멋쩍게 웃었으나 이미 관계는 연인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녀에게 왜 거짓말했는지 물어보니 “오빠가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진도가 안 나가서 내가 먼저 찔러 봤지”…

역시 사랑은 언제나 비논리적으로 시작된다. 대략 이렇게 말이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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