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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09. 2016

확신하지 않음을 견지하기

혼탁을 넘었을 때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오빠 친구들은 왜 다 그래요?”
내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아내가 핀잔을 준다. 나로선 친구이기도 해서 뭐라 반박하고 싶지만 실제로 친구 대부분이 이상하다.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아내와 친구들이 안 마주치도록 노력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만 되겠는가.


그렇다면 애당초 왜 친구들이 다 그러한가? 그건 나의 친구 사귀는 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나는 사람 볼 줄을 모른다. 첫눈에 모범적으로 보이면 어김없이 퇴폐적인 인물로 밝혀지고, 낙천적인 줄 알았던 이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살 이유 같은 거 없지 않나요?”라는 말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하도 잘못 보는 통에 아예 3년은 두고 보며 사람을 평가하자는 원칙을 갖게 됐다. 잘났다는 사람은 잘난 대로, 개방적인 사람은 개방적인 대로,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적인 대로 방관자적 시선으로 수용한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나름의 판단이 생길 때도 있지만 최대한 억누른다.


문제는 3년이나 부대끼고 나면 상대가 어떻든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져 버린다는 점. 게다가 엉망진창 인물들은 보통 다른 친구가 잘 없는 탓에 내 주변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래서 현재 교우관계가 이 지경이 돼 버렸다(써놓고 보니 알겠구먼. 역시 늦었지만).
 
“요즘 대학생은 무슨 생각 하며 살아요?”
취재원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다. 물론 난 우물쭈물한다. 대학생 대상 잡지를 만든다고 20대를 몽땅 아는 것은 아니잖아,라고는 해도 묻는 쪽 잘못이 아니다. 원래 기자란 상대를 파악하고, 현상을 요약하고, 결론을 내리는 게 본업이니까. 『대학내일』이란 매체 특성상 대학생에 대해 묻는 것도 당연하다.


다른 기자들도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취재를 하면 할수록 명쾌해지기는커녕 점점 복잡해진다. 표지 촬영차 만난 여학생이 모 은행 홍보단 활동으로 카드 고객 모집을 한다기에 당시 구상 중인 ‘학생 착취하는 대학생 프로그램’ 기획 기사를 떠올리며 기업의 비정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나중에 마케팅을 하고 싶은데, 제가 유명 대학 나온 것도 아니잖아요. 바로 마케팅 직종에 취직하진 못할 것 같거든요. 영업으로 시작해야겠죠. 이런 영업 경험이 진짜 도움돼요.” 어라. 그런 거였어? 기획 기사는 보류됐다.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2곳의 대표를 인터뷰했다. 한 명은 인터뷰 내내 겉치장에만 빠진 패션계를 비판하며 스트리트 정신을 강조했고, 다른 한 명은 “나는 기본적으로 멋진 물건을 파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말했다. 말만 들으면 전자는 멋진 문화인, 후자는 그냥 장사꾼이다.


그러나 더 알고 지내며 알게 된 실제는 전혀 달랐다. 정신을 강조하는 대표는 별다른 역할도 없이 주야장천 멋진 말만 하다가 업계에서 잊힌 반면 물건 잘 팔겠다는 대표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과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만들고, 손님이 제품을 구매하면 그만큼의 의류를 빈곤 계층에게 전달하는 등 멋진 캠페인을 이어갔다. 오리지널리티 있는 제품을 선보임은 물론이다.


어느 날 이 대표에게 전화가 와선 자기가 다니는 대안학교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대머리에 수염 난 파격적 스타일, 힙한 파티를 주최하는 아저씨가 대안학교 선생님이라니!
 
사람을 평가하지 않자는 주의임에도 딱 하나 꺼리는 이는 세상사를 쉽게 단순화시킨 후 확신하는 유형이다. 약간의 경험과 단순한 삼단 논법으로 무장한 그들의 논리는 깔끔하고 알기도 쉽다. 1) 요즘 20대는 일감이 남아도 정시에 퇴근하려 하더라. 2) 할 일을 다 안 하고 퇴근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다 3) 요즘 20대는 이기적이다. 이 사고엔 직장 개념이나 근무 효율성에 대한 인식 변화는 쏙 빠져 있다.


20대도 마찬가지다. 지원금과 수상 경력만 챙긴 채 그걸 스펙 삼아 취직하려는 ‘먹튀 창업’이 존재함에도 어떤 20대는 ‘취업은 타협, 창업은 도전’이라며 공식처럼 되뇌며 그럴듯해 보이는 창업자는 무조건 추어올린다. 취업자들은 무조건 헐뜯으면서 말이다.   
 
“인간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판단을 유보하도록 훈련받지 않는 한 자신만만한 예언자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을 참아 내기란 힘든 일이지만, 미덕이란 대개 불확실한 법이다. 어떠한 미덕이든 그것을 배우려면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이야기다.


러셀은 우리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갈등(크게는 전쟁부터 작게는 남녀 간 다툼까지)이 쉽게 확신하는 인간의 습성 탓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판단을 유보하기 법을 배우기 위해 가장 훌륭한 훈련은 철학이라고도 했다. “으악! 철학까지 공부해야 하는가?” 질색할 이들을 위안하자면 버트런드 러셀은 그 정도로 낙관적인(?) 철학자는 아니어서, “귀중한 전문 지식을 얻느라 바쁜 청춘 남녀들이 철학 공부를 위해 뭉텅이 시간을 바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굳이 먹고 사는 데 시간을 침해하지 않고도 철학을 통해 몇 가지 것들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러셀은 철학을 “잘못된 사고를 특이할 정도로 요령 있게 시도하는 일”로 정의했다. 무언가 당연하다고 여겨질 때, 심지어 자신에게도 그게 옳아 보일 때 굳이 반대편 의견이 맞다고 가정해보는 자세다. 모두 애국을 칭송할 때 비 애국, 모두 ‘진상’ 친구를 비판할 때 그 친구의 사정. 반대편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다.


당연하다 여겨지는 걸 뒤집어 보는 습관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적절한 근거 없이 확신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를 자각한다. 자각을 통해 얻은 ‘불확실 습관’은 실제 삶에서 마주한 문제를 사려 깊게 사고하도록 만들어준다.  
 
미국 드라마 <퍼셉션(Preception)>의 주인공 다니엘 피어스는 FBI를 도와 범죄를 해결하는 괴짜 교수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피어스 교수는 약을 제때 먹지 않으면 헛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다.


환상이 자기 눈엔 꼭 사실처럼 보이듯, 명백해 보이는 현상 이면에 무언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놓지 않는다. 모든 증거가 결백한 용의자를 지목할 때도 일말의 다른 가능성을 부여잡고 끝끝내 진상을 파헤친다.
 
2시즌 13번째 에피소드 마지막 장면, 피어스 교수가 말한다. “왜 우리는 거짓말을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요? 불신은 대뇌피질의 띠 모양 부분, 고통과 혐오를 처리하는 것과 동일한 부분에서 처리됩니다.


말 그대로 거짓말을 ‘혐오’하는 거죠. 하지만 이 사실은 동시에 우리 인간이 왜 그렇게 무언가 믿기를 갈망하는지도 알려줍니다. 산타클로스나 중력의 존재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확신할 때 뇌는 감정적인 보상을 해줍니다. 기분 좋게 만듭니다.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하죠.


하지만 확신하던 게 거짓으로 드러나 우리가 우리 머릿속 신뢰 시스템 자체를 불신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괴로워할 것입니다.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겠죠. 하지만 결국 우리 뇌는 ‘비판적인 사고’라는 균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 평가를 미루다가 만난 친구들은 내가 떠올린 적 없는 생각을 전했고, 해보지 않던 행동을 함께 해주었다. 내 한계를 한 뼘씩 넓혀 준 셈이다. 취재를 하면 할 수록 세상 일을 판단하기는 힘들어졌지만 그 불확실은 무지에 기인한 과거의 불확실과 차원이 달랐다.


상투성을 벗어난 세상의 결이 보였다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잡문집.에서 '혼탁을 헤치고 나서야 보이는 정경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munchi@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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