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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10. 2016

보트 한 대 분량이면 충분하다

요즘 버리고 살기가 유행이죠?

어떤 문장은 별 이유 없이 머릿속에 박힌다. 시시때때로 떠오른다. 어디서 읽었는지 까맣게 잊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문장 중 하나가 이거다. “사람이 살면서 소유한 물건은 보트 한 대 분량이면 충분하다.”


언뜻 듣기엔 그럴싸하지만 따져보면 애매하다. 보트라면 마이애미 갑부가 타고 다니는 대형 유람 보트인가,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조그만 보트인가. 맥락을 유추했을 때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물건이라 칭해지는 것의 범위는? 침대나 책상을 포함한다면 노인의 보트로는 어림없을 텐데. 장면이 깔끔히 떨어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한 채 살지 말라는 이야기일 테다.
 
‘저소유’의 필요성을 절감한 건 신혼집 이사차 방 곳곳에 짐을 쏟아냈을 때다.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집안에 엄청난 양의 물건을 쟁여두는 사람들이 나온다. 물건 더미 탓에 다리 뻗고 누울 공간도 없으며 부패한 쓰레기가 구석구석 쌓여 있다. “할머니 이렇게 사시면 건강에도 안 좋아요.” “내 집이야, 꺼지라고!” 옥신각신하다가 끝내 설득당하고, 자원봉사자 수십 명이 와서 영차! 단번에 비워버린다.


미국에선 이런 저장강박증 환자를 ‘호더(Hoader)’라고 부르는데…“오빠, 이 물건 다 가지고 가면 새집도 비좁을 거예요.” “내 거야, 놔두라고!” 내가 바로 호더였다.
 
불행히도 당시 물건 버리기는 옵션이 아닌 필수였다.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결혼하는 바람에 서랍장은 커녕 식탁 살 여유도 없던 탓이다. 서랍장이 없으면 짐을 모두 마룻바닥에 둬야 한다.


눈물을 머금고 물건 더미를 뒤지는데 별의별 게 다 나온다. 예를 들어 1998년 고려대 응원가 소책자와 고려대 배지. 연고전 때 함께 술 마시던 고려대 여학생에게 강탈해왔다(난 연세대). 중간 키에 눈코입이 균형적으로 자리잡은 예쁜 영문과 학생이었다. 미국에 오래 살다 온 여성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발음이 섹시했는데, 이건 그냥 그만 쓰기로 하자. 추억의 물건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신입생의 추억이 담긴 이 물건도 과감히 쓰레기통행.
 
다음은 군대 훈련소에서 쓴 일기 비스름한 노트. 중간쯤 펼쳐 몇 줄 읽는 순간 이것은 ‘버려야만’ 하는 물건이라는 걸 알아챈다. 엄마 아빠가 제일 중요해 이러쿵저러쿵, 세상 사람들은 저러쿵이러쿵. 중2병에 감성 과잉에 최악이다. 만약 내가 대문호가 되고, 쓰는 책마다 족족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다.


유명세도 소용없이 나는 숨을 거둔다. 그런데 후손 놈들이 뭐라도 더 팔아먹으려고 뒤지다가 훈련소 노트를 발견하곤 『이정섭의 훈련소 생각』 따위로 출간을 시도한다면. 역시 위험하다. 쓰레기통 직행.
 
묘하게 불길한 티셔츠를 발견한 건 옷장 정리할 때였다. 포대 자루 같은 핏에 추레한 빨간색, 붉은 악마 티셔츠인가 싶어 문구를 읽는데 손이 벌벌 떨린다. “청년이 서야 조국이 선다”. 운동권 티셔츠다. 이건 내 것이 아니다. 이국진 거다. 이국진이 누구냐면, 대학 다닐 때의 운동권 친구로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으나 종북몰이에 휘말릴 경우 헤어질 의향이 있다(결혼 축사까지 해준 이국진에겐 미안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이런 불온한 티셔츠를 보관하다가 걸리면 큰일이다. 까만 매직으로 이국진 이름을 크게 쓴 후 얼른 버렸다.
 
그리고 책, 책, 책. 인문학도 아니랄까 봐 몇 백 권은 족히 될 분량을 쌓아두었다. 책을 버리지 않는 이상 짐 줄이기는 포기해야 할 지경. 그렇잖아도 책 더미에서 허우적거리던 처지다. 버릴 의향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읽고 싶어질 것만 같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평생 안 읽겠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훌륭한 책이지 않은가. 마음이 복잡하다. 『주홍글자』를 불태우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법정 스님의 마음으로 책들을 처분했다.
 
미국 텔레비전에 호더의 집을 반강제적으로 치워주는 <Hoarding: Buried Alive(생매장!)>란 프로그램이 있다. 불우한 어르신 일색인 우리나라 호더와 달리 미국 호더는 나이부터 성격까지 각양각색. 새파랗게 젊은 양아치 호더, 나름의 질서를 갖춘 부유한 호더, 심지어 집안을 양분해 물건을 쌓는 쌍둥이 호더까지.


개중에는 꽤 거칠게 저항하는 치도 있는데 방송진 역시 단호하게 몰아붙인다. “물건을 쌓아두는 건 이웃에게도 당신에게도 피해라고요!” 미국은 경찰과 위생 당국이 힘을 합쳐 호더 대책반을 운영하는 나라다. 위생 문제라도 걸고넘어지면 호더 쪽도 곤란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저항하던 호더도 마침내 포기하고 청소를 당한다. 청소 장면을 응시하는 호더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시청자들은 저렇게까지 울고불고할 일인지 고개를 갸웃대지만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방송에 출연하는 심리치료사 줄리 파이크씨는 사람들이 호더의 슬픔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걱정했다. 파이크씨에 따르면 호더가 쌓아놓은 물건들은 자신의 아픈 현실을 가리는 일종의 방패막이며, 호더에게 물건 버리기는 마음을 까뒤집는 행위다.
 
“많은 사람이 애착도, 필요도 없는 수천 톤의 물건들에 둘러싸여 생을 마감한다. 이들은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쌓아둔다. 과거와 추억에 집착하느라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랑스 에세이스트 도미니크 로로가 저서 『심플하게 산다』에서 한 이야기다.


요즘처럼 저가 물건이 판을 치고, 스트레스를 소비로 푸는 세상에선 부자든 빈자든 방구석이 물건으로 채우는 건 쉬운 일. 오히려 물건을 채우지 않는 행위야말로 이념과 의지가 모두 갖춰졌을 때 나오는 대단히 어려운 경지인 것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면 결국 보트 한 대 분량,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싼타페 승용차 한 대 분량으로 짐을 줄였다. 물건을 과격하게 줄이기 위해선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1용도 1물건 정책>. 1가지 용도의 물건이 2개가 있으면 안 된다. 시계든 카메라든 딱 하나씩이다. 새로 생기면 그 전의 것을 버린다. <1물건 다용도 정책>.


아이패드로 TV 보고, 음악 듣고, 게임 하고, 알람도 듣는다. 드립용 커피메이커를 물 주전가 겸용으로 쓴다. 이 기조는 서랍장을 마련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쇼핑하러 가서도 기존 물건과 쓰임새가 겹치지 않는지, 집안 여유 공간은 충분한지 꼼꼼히 따지고 든다. 대개는 급격히 피곤해지면서 쇼핑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돈도 아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로로씨가 말씀을 참 잘하시니 마지막으로 인용하자면 “여백이 있는 방은 빛으로 채워진다. 물건이 거의 없는 방에서는 찻잔 하나도 존재감을 가진다. 책 한 권이나 친구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모든 게 작품이 되고 정물화가 되고 매 순간이 소중한 시간이 된다.” 그야말로 그렇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munchi@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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