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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11. 2016

우주는 우리를 어떻게 위안하는가

영화 그래비티를 보고 생각한 것

이런 영화를 상상해보자. 배경은 우주. 하지만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 지구 궤도를 돌던 유인 우주선에서 사고가 나 승무원들이 탈출하는 이야기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는 달랑 3명인데, 그 중 하나는 나오자마자 죽는다. 남은 둘 중 하나가 무려 조지 클루니다.


조지 클루니는 매우 잘 생겼지만, 그의 영화 선택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최근작이 <아메리칸> <초 민망한 능력자들> <인 디 에어>다(이중에 한편이라도 봤다면 당신은 영화마니아). 자식을 잃은 우울한 과학자 주인공 역은 산드라 블록이 맡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영화 내내 침묵하는 바람에 부쩍 말이 많아진 조지 클루니가 더욱더 조잘댄다. 무슨 오디오북처럼 조지 클루니의 목소리만이 우주 공간에 울려퍼진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 이야기다.

설명만 보면 <그래비티>가 실험적인 다큐영화처럼 보인다. 관람 전까지 나는 이 영화에 1억 달러나 부어넣었다는 투자자 일동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래비티>는 전 세계적인 흥행 중이다. 미국에선 3주째 박스오피스 1위, 국내에서도 1주일 만에 300만 관객을 끌며 1위.


미국 영화전문가들 사이에선 <그래비티>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최초의 SF 영화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언제부터 전 세계 영화 관객들이 '하드 SF'를 좋아했단 말인가? ‘저주 받은 걸작’이라면 몰라도 ‘당대 흥행작’이라니!

(스포일러!)영화의 처음, 카메라는 20분짜리 롱케이크로 압도적인 우주 공간과 이리저리 떠다니는 조그만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진짜 우주에서 찍은 듯 한 생생한 장면 덕에 관객은 한 숏이 20분이나 이어졌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맷 코왈스키 사령관(조지 클루니 역)은 가스 분사 추진기에 몸을 의지한 채 농담 따먹기나 하며 날아다니고, 승무원 샤리프(팔두 샤르마 역)는 뭐가 그리 흥겨운지 우주 춤(?)을 추며 놀고 있다.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역) 혼자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느라 낑낑댄다. 코왈스키는 평생 우주를 탐험한 베테랑이라 걱정이 없다. 어차피 망원경 수리일 뿐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NASA에서 긴급 메시지가 온다. “미션 취소, 미션 취소” 러시아에서 폐기된 자국 인공위성을 미사일로 파괴했다가 그 잔해가 지구 궤도를 돌며 수많은 인공위성을 박살냈다는 소식이다. 잘게 부서진 잔해들이 궤도를 따라 도는데 그 경로에 코왈스키 일행이 있다고 한다. 부랴부랴 귀환하려는 순간 잔해는 일행을 덮치고 샤리프는 즉사, 스톤 박사는 조각에 맞아 뱅글뱅글 돌며 먼 우주에 내던져진다. 우주는 마찰력이 없는 공간이다. 한번 힘을 받으면 붙잡을 것이 없는 이상 한없이 계속하는 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어디냐는 코왈스키의 물음에도 스톤 박사는 답을 못 한다. 위 옆 아래 모두 새카만 우주다. 우주복 안의 산소는 점점 줄어만 들어간다. 카메라는 우주 미아가 된 스톤 박사의 겁에 질린 얼굴을 가득 담는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악역이 있다면 우주 공간 자체다. 극한의 추위, 산소 없음, 몸을 가눌 수도 없는 무중력 등 어느 하나 생명체에게 호의적인 요소란 없다. 애초에 생명이 살아가라고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이다. 스톤 박사와 코왈스키 사령관은 이어지는 위협을 지혜와 의지로 헤쳐나간다.  

(진짜 스포일러!)그런데 목숨을 위협하는 그 우주가 궁극적으론 주인공들의 영혼을 치유해주는 역설이 영화의 핵심이다. 스톤 박사를 구해내고 자신은 귀환불가능한 우주 유영을 시작한 코왈스키 사령관의 얼굴엔 평화와 경이감이 가득하다. 지구 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은 채 지구를 응시하면서 코왈스키가 말한다. “갠지스 강 위에 걸린 해를 꼭 봐야 해요. 진짜 놀랍도록 아름다워요.(You should see the sun on the Ganges. It's amazing)”


코왈스키의 짓궂은 자기 비하 농담에 드러나는 그의 삶은 우주 미션밖에 없다. 평생 우주 공간을 떠돌았지만 그동안 아내는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 그 ‘미션’마저 끝난 마당에 코왈스키의 삶엔 어떤 ‘의미’가 남아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는 자기희생으로 타인을 살려냈으며 ‘어머니 지구’를 관조하며 우주로 사라진다.

스톤 박사는 어린 딸을 사고로 잃었다. 놀이터에서 뛰어놀다가 넘어졌는데 머리를 부딪혔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점이 스톤 박사에겐 더 힘들다. ‘대체 세상은 왜 내 딸을 데려갔는가? 혼자 남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 그녀에게 우주는 시련을 무더기로 퍼붓는다. 겨우 탑승한 우주정거장엔 화재가 일어나고, 탈출선에 탑승하지만 낙하산 줄이 걸려 또다시 위기다. 평생 선하게 살았지만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고 하느님에게 따지는 성경 속의 욥이 떠오른다. 그러나 성경 속 하느님이 욥에게 말했듯 신의 뜻 혹은 자연의 뜻은 인간의 시시비비로 판단할 수 없다. 딸의 죽음도 인간의 시비와 관계없다.


영화 내내 “어떻게 해요?” “어디로 가야 해요?” 외치던 스톤 박사는 불타는 탈출선을 타고 지구로 떨어지면서 마음 먹는다. ‘10분 만에 불타 죽거나. 내려가서 모험담을 이야기해주거나. 둘 중 하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사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 메시지가 궁극적 지혜며, <그래비티>의 가치는 이 메시지 전달에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텍스트로 적힌 지혜는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에게 없는 건 그렇게 살 수 있는 관점이다. <그래비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전히 ‘우주’다. 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정서다. 우주는 지구별 삶에 붙잡힌 우리의 미천한 시선을 단번에 거대한 시공간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거대한 시공간의 관점에서 다시 지구별 삶을 바라보도록 자극한다.


범신론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처럼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보면 세상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겠다. 전 세계 사람들이 <그래비티>를 보고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감동은 아마 이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가 조그맣게 담긴 사진을 보며 천문학자 칼 세이건-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munchi@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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