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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16. 2016

누군가의 고민에 답하는 방법

똑똑하고 아니고는 별상관 없습니다

푸웁!
 
마시던 술을 입으로 뿜었다. 장소는 동네 술집, 함께 술 마시는 이는 친구. 내게 건넨 말은 “근데 말이야. 요즘 좀 고민되는 게 있어.”이건 반칙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여자 이야기나 할 것처럼 해놓고 느닷없이 인생 이야기를 꺼내 평화로운 술자리를 어지럽히다니! 원래 이러던 친구가 아닌데. 쯧쯧.
 
술자리에선 멍청한 이야기만 하자는 게 내 원칙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쁜 머리가 술 들어가면 더 멈춘다. 삶의 지혜 같은 건 가만 보자…. 아! 원래 몰랐구나.친구가 자기 아픔을 이야기할 때면, 주로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슬픈 눈빛으로 약간 아래쪽을 보며 멍을 때리는데, 그런데도 몇 년씩 고민 상담이 반복되는 걸 보면 상황을 모면하려는 내 표정이 ‘사색’하는 것으로 오인되지 않았나 싶다. 글 쓰는 직업이라는 점 역시 한몫했을 테고.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고민 상담을 접하면 곤혹스럽다. 무엇보다 나 따위가 누군가의 고민에 답할 처지가 아니다. 내성적인 성격, 좁은 인맥, 학사경고 2번으로 대표되는 엉망진창 대학 생활, 우울한 백수 경력, 연애사는…말을 말자. 좋으면 달려들다가 상대를 질리게 하고, 여자 친구가 있는데 딴 여성에게 빠져 헤매고. 하여튼 말을 말아야 한다.
 
지난해 에세이를 쓰면서 자기 고민을 전하는 20대 독자 메일을 드문드문 받았고 그에 답하는 글을 쓰려 할 때마다 앞선 이유로 고민이었다. 지금도 중2병에 벗어나지 못하는 30대 남자가 20대의 고민에 답한다는 게 과연 말이 되나? 만약 내가 누군가의 고민에 답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이 글은 그런 궁금증에 대한 나 나름의 결론이자, 거창하게 말하면 타인의 인생에 대해 우리가 무언가 말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우리 같은 놈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돈도 없지, 가방끈 짧지, 백그운드도 없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쩨쩨하게 빈집이나 털고 다니는 정도야. (중략)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속 세 주인공은 빈집털이 삼인방, 도둑질 후 도망치다 차가 고장 나버린다. 터벅터벅 걸어 숨어든 곳이 폐가가 된 ‘나미야 잡화점’이다. 잡화점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체통에서 편지 한 통이 툭 떨어진다. ‘깜놀’한 일행은 편지를 펼쳐보는데 거기엔 웬 여성의 고민이 적혀 있다. 편지는 무려 1979년. 먼 과거에서 왔다.
 
잡화점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 20여 년 전 잡화점 주인 할아버지는 소일 삼아 익명으로 보내는 편지들에 상담을 해주었고, 사소한 고민이라도 정성껏 들어주는 할아버지 덕에 나미야 잡화점은 고민상담 잡화점으로 이름을 떨쳤다.
 
할아버지는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잡화점은 폐가가 됐고, 당연히 고민상담도 끊겼다. 세월이 흘러 좀도둑들이 발을 들인 순간, 우체통을 통해 과거의 고민 편지가 쏟아지고, 반대로 현재의 답장은 과거로 날아가는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타임 슬립은 무척 신기하지만 좀도둑들 입장은 바뀐 게 없다. 무식한 자신들은 고민에 답할 능력도 없거니와 이런 일로 시간을 끌면 경찰에 붙잡힐 뿐,이라는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찝찝하다. 편지에 답할 수 있는 건 좀도둑 3인방뿐이다.
 
“아무튼 뭔가 좀 써볼까?” “대단한 충고는 못 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어떻게든 살아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마음 약한 좀도둑들은 시공을 초월한 고민상담을 시작한다.
 
좀도둑들의 상담 편지는 그야말로 어설프다. 음악을 포기하려는 무명 가수에게 배부른 소리 말라고 답장 쓰질 않나, 가난이 싫어 술집 호스티스가 되려는 여성에겐 ‘그렇게 살면 안되는 법이다’라고 짐짓 훈계하질 않나. 화가 난 상담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따지면 마음 약한 도둑들은 또 금방 ‘반성’한다. 하긴 우리들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겠느냐, 도둑질하고 도망가는 중이면서 남 잘못 지적할 것도 없다. 한 통 두 통 편지가 오갈수록 상투적 조언은 사라진다. 사회 밑바닥을 살던 경험은 공감으로, 무식에 대한 자각은 열린 마음으로 점차 바뀐다.
 
때는 4년 전 짧은 일간지 기자 시절, 장소는 경찰서, “쯧쯧 K대생인데 왜 뛰어내려서. 중소기업이라도 취직하면 되지.” 말을 건네는 사람은 나이 든 형사다. 한강 수난구조대에서 자살한 시신을 건져왔는데, 언론이 좋아할 요소는 다 가지고 있었다. 명문대, 등록금을 못 낼 만큼의 가난, 낡은 고시원 거주, 공무원 준비, 게임 중독. 신문사들은 각자 입에 맞는 주제로 기사를 뽑아냈다. 자살자를 탓하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게 왜 게임중독에 빠져서” “명문대생인데 중소기업에라도 취직하면 되지 않느냐.”
 
쉽게 단정 짓는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독에 빠지려고 게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 입장에선 아무데나 취직하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이 명문대에 갔다면 주변 기대가 컸을 테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못 견뎌했고, 괴로운 현실을 잊고자 게임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
 
‘모른다.’ 우리가 아는 건 상대의 상황을 내가 모른다는 것뿐이다. 아무리 뻔해 보이는 일도 있는 힘껏 판단을 미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다른 이의 고민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병약함이야말로 우리에게 눈치를 채고 배우게 만들며,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몰랐을 과정을 분석하게 한다. 매일 밤 곧장 침대로 들어가는 사람,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그 순간까지는 죽은 듯 푹 자는 사람은 잠에 관해서 어떤 사소한 관찰도 불가능하다.”
 
소설가 마르쉘 프루스트는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고통의 대상을 진지하게 탐구할 동기가 된다고 했다. 고로 나의 멍청함, 나의 나쁨, 나의 경험과 무경험이 오히려 불우한 20대를 이해하는 동기가 될 것으로 믿으며 고민 있는 독자들은 munchi@univ.me로 보내주시길. 해답은 아니고 뭐랄까… ‘고민에서 촉발된 나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익명입니다.
 
Editor 이정섭 munchi@univ.me
Illustrator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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