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간 개복치 Aug 17. 2016

왜 우리의 말은 뻔해지는가

우리는 주류에 속해려고 뻔한 사유를 내것으로 합니다


90년대 부산에 살면서 야구를 안 좋아한다,라는 건 곤혹스런 일이었다. 당시 롯데 팬들은 누군가 야구를 싫어한다는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지금도 마찬가지일까?). “이번 경기 진짜 굉장했지 않아?” “아, 난 야구를 잘 안 봐서.” “마해영의 타격폼은 정말이지 어이없어.” “그래? 타격폼 같은 건 모르는데.” “공필성은 또 어떻고. 사구가 벌써 몇 개째야. 근성이 대단해. 그나저나 롯데 이번엔 플레이오프 가지 않을까?” “플레이오프가 뭐야?” 대화가 이런 식이다. 부산 남자 고교에서 야구는 소통의 기본이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척했다. 억지로 야구 기사도 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무조건 소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래 집단에 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통은 본디 너와 나의 공통 소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너 음악 좋아해? 나 음악 좋아해. 너 <아이언맨 3> 봤어? 나 봤어. 그래서 첫 만남의 소재는 공통분모가 넓어야 한다. 소재가 일치할수록 대화가 이어지기 쉬워진다. 첫 만남에 다짜고짜 “이번 피에르 바야르의 신작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보셨어요? 전작의 변주지만 또 다른 통찰이 있다니까요”라고 하면 당연히 안 된다. 


어쨌든 남고생 사이의 대화에 대단한 수준까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시간을 공유하는 게 목적이다. 동질감을 키워가려는 잡담이다. 소통에는 단계란 게 있고, 잡담에는 잡담의 역할과 잡담의 수준이란 게 있는 법이다. 


소통의 수준에 대해 다시금 떠올린 건 얼마 전 성년의 날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사회자와 게스트가 성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세태를 꼬집으며 한참을 진지하게 말하다가 어느 쪽인가가 성년의 의미에 대해 청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해줬다.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게 어른의 의미입니다.” 음, 그랬구나. 난 또 어른이라면 책임을 회피대도 되는 줄 알았지,라고 할 것 같으냐! 그건 어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모두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는 걸까? 


그러다 문뜩 수긍했다. 라디오 토론 역시 그저 시간을 함께 하려는 잡담이구나. 내용의 수준보단 동질감을 형성한다는 자체가 중요하구나. 또 문뜩 든 부정적 생각, 그런데 우리에게 이것 이상의 소통이 있었던가? SNS를 떠도는 의견도 딱 이런 수준. 우리 사회 담론의 수준이라는 게 잡담의 수준이로구나.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는 다큐멘터리를 봐도 주제는 도덕 교과서 수준이다. 휴먼 다큐는 ‘돈도 없고 상황도 나쁘지만 가족 간의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다’. 자연 다큐라면 ‘인간의 탐욕으로 자연이 멍들고 있다’. 얼굴과 배경만 바뀔 뿐 서사는 동일하다. 무슨 날만 되면 나오는 이야기도 똑같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광복절이면 일제 강점기의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족이 주는 악영향이나, 우리 안에 숨어있는 식민주의적 태도를 따져볼 순 없을 텐데 그런 깊은 토론은 없다. 그래 착한 이야기야 좋은 거겠지.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게다가 텔레비전 방송이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텔레비전이 아니면 얼마나 다를까? 종이 매체는 태생적으로 영상 매체보다 복잡한 내용을 다룰 수 있다. 스크린 앞을 앉을 때와 지면의 펼쳐 들 때의 마음가짐은 다르다. 복잡한 내용을 읽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선 종이 매체 역시 뻔한 내용만 쏟아낸다. 5 · 18을 맞아선 모든 신문은 사설을 통해 국민통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점에는 지나친 경쟁사회, 경쟁심을 버리고 느리게 살아야 한다는 책이 쫙 깔렸다. 


국민통합을 소홀히 해야 한다거나 경쟁을 찬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상투적 소재로 누구나 동의할만한 주장만 끝없이 되풀이하는 게 의미 없다는 소리다. 당위적인 게 안 되는 데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상투적 당위론은 부모님의 잔소리만큼이나 역효과를 낸다. 무엇보다 사안을 진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신문이나 잡지, 책 심지어 텔레비전을 통해 낯설고 새로운 논리들이 펼쳐진다. 낯선 논리가 촉발한 논쟁이 대중의 사고를 자극한다.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특별 취재원으로 학살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했다. 그리고 써낸 보고서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며 오히려 너무도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너무 평범하기에 국가가 정해준 생각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끔찍한 학살을 펼칠 수 있었다고 아렌트는 설명했다. 


나치는 태어날 때부터 사악한 종자라는 명제가 대세인 시절이었다. 아렌트는 주체적인 생각 없이 주류 의견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악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그녀는 유대 사회에서 배척받고 말았다. 그러나 아렌트의 이론은 결국 전 세계인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만들어진 신』을 통해 신과 과학을 분리해 인식하는 통념을 공격했다. 우리 사회에서 신과 과학은 공존한다. 종교를 가진 과학자도 많다. 종교는 정신적인 부분, 과학은 현실적인 부분을 책임지면 된다는 게 일반의 인식이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유일자가 창조한 세상과 빅뱅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공존할 수 없다’며 종교의 영역을 낱낱이 논파한다.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기도 힘마저 통계와 논리로 공격했다. 미국은 대통령이 취임식 선서 때 성경 구절을 읊는 나라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도킨스는 굴하지 않고 방송에마저 자주 출연해 미국사회 무신론의 아이콘이 됐다. 
 

낯선 주장은 때론 맞고 때론 틀린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낯선 주장이 사회에서 경청된다는 점, 그래서 때론 시민의 사고 수준을 조금씩 발전시킨다는 사실이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정치적 올바름, 그 무구한 흑백논리’란 기사를 통해 프랑스 작가 필리프 뮈레의 주장을 소개했다. 유기농, 공정무역, 인도주의 등 누구나 좋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뮈레는 격렬히 비판한다. 우파여서가 아니다. 그 의견에 반대해서도 아니다. 옮음에 대한 당위적 접근이 사고 활동을 억압하게 될 거란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옳다고 합의된 주장과 조금만 다르더라도 비민주적이라며 비판받고 매장당한다. 일본에서 배울 것은 배우자는 의미로 조영남이 자신을 ‘친일파’라고 주장하자. 내용 자체는 별 논쟁거리가 아님에도 조영남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뮈레는 옳다고 확신되는 하나의 주장이 마치 종교 교리처럼 주입되는 사회를 ‘선의 제국(The Empire of Goodness)'이라고 표현했다. 악의 제국이 그렇듯 선의 제국도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킨다. 
 

사람들이 뻔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건 부산 남고생의 롯데 이야기과 같은 이유다. 누구나 동의되는 것으로 쉽게 소통하기 위해서. 여기서 방점은 ‘소통’이 아니라 ‘쉽게’에 찍힌다. SNS를 가득 메운 ‘착한 소리’의 바닥에는 어떻게 해서든 무리에 소속되고 싶다는 나약함,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려는 사고의 안이함이 깔려 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책은 우리들이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사유도 마찬가지. 뻔한 감성, 뻔한 논리를 깨부수는 그런 사유를 해야 한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munchi@univ.me

작가의 이전글 누군가의 고민에 답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