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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06. 2016

중2병 치료법

적어도 자신을 면밀히 살펴서는 안된다

21년 전 중학생 시절. 수년째 꼴찌를 면치 못하던 롯데자이언츠가 맹활약을 펼치며 부산 바닥을 뒤집어 놓던 그해, 그 바람에 국어 선생님과 교감이 모두 롯데 출장 경기를 보러 떠나 학생들이 뜻밖의 여유를 만끽하던 그 날, 나는 흔히 ‘중2병’이라 불리는 몹쓸 심리 상태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친구가 불러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허세 섞인 문장을 일기장에 채웠다.


중2병은 불현듯 찾아왔다. “이정섭 군 맞으시죠? 중학생 맞으시고요? 그러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 해 3월쯤부터였을까. 내 존재에 의미 따윈 없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공부 실력은 학급의 중간, 운동 실력은 바닥, 싸움 실력으로 따지면 도도새 정도?

중2병은 보편적인 증상이다. 명칭부터 중학생 상당수가 겪음을 암시한다. 중2병엔 과학적 근거도 있다. 공공장소에서 괴성을 지르는 꼬마들을 보며 사람들은 저 . 연구팀은 10살짜리와 13살짜리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관찰했다.


대부분 비슷했으나 자아 인식에 관련된 질문을 던졌을 때는 차이가 컸다. 자아 인식을 관장하는 전전두피질이 13살에게서만 격렬히 활성화됐다고 한다. 만 13살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1학년쯤 되겠다.

자의식이란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는 세상은 이런 곳이며, 세상에서 나는 이런 의미다'라는 생각이다. 사탕 한 알에 기뻐하던 코흘리개 꼬마는 중학교 2학년을 맞아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 마주한 세상, 나에 대한 사실은 쓰디쓰다. 세상엔 나 말고도 수많은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는 모두 나만큼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중2병은 (허세 섞인 사진과 글을 쏟아내는)그 현상으로선 비합리적이지만, 원인 분석 면에선 꽤 정확한 셈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기 없는 에세이』에서 ‘행복’이란 기준으로 볼 때 인간은 쥐새끼만도 못한 존재라고 했다. “내가 아는 박식한 지식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심지어 안정적인 수입을 누리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꾸벅꾸벅 조는 사이에 식탁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생쥐만큼이라도 행복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행복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어떤 강아지도 옆집 강아지의 화려한 밥상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어느 고양이도 같은 삶이 반복됨을 허무해하지 않는다. 잔칫상 앞에서 괴로워할 수 있는 건 자의식을 가진 인간밖에 없다.

중2병 환자들이 자신의 자아를 껴안고 쩔쩔매고 있을 때 영국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전 인류의 자아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가 지속성을 갖는 근거는 무엇인가" 중2병 환자들과 달리 바지니는 일기장에만 끼적이지 않았다. '개인적 정체성'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자아의 정체를 좇아 세상을 누볐다.


성전환수술을 한 트렌스젠더를 만나 육체와 자아의 관계를, 치매환자를 통해 기억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으며,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부터 최첨단 뇌과학 실험까지 자아에 관련된 모든 이론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렇게 쓴 책이 『에고 트릭(Ego trick』이다.

책의 결론은 충격적이다. 바지니는 고정된 실체처럼 보이는 자아(ego)란 속임수(trick)라 단언했다. "우리의 정신은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차곡차곡 쌓이는 지각 또는 생각의 연속일 뿐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들, 이런 생각들을 소유한 무엇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은 이런 생각들의 모음일 뿐이다." 그에 따르면 육체, 기억, 사회적 역할 모두 ‘나’라는 인식을 형성하는 한 요소며, 그것들의 덩어리가 자아다.


스토리텔러의 대가인 우리 뇌는 감각과 기억을 이리저리 이어붙이며 때론 조작해서 명쾌한 자아를 만들어낸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자서전적 자아’, 나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할 때 그런 자아는 환상일 뿐이라고 줄리언 바지니는 설명했다.

바지니의 주장은 ‘생각하는 나’만은 확고부동하다는 믿음을 무너뜨리며 우리를 불안케 만들지만 동시에 평생 우리를 괴롭혀온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관련한 중요한 실마리를 알려준다.


자아를 규정하는 불변의 무엇이 없다면. 자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내가 그렇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묶여있을 뿐이라면,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자아가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이란 긴 탐구를 통해 각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아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도도새는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살았던 통통한 새다. 날지도 뛰지도 못했지만 ‘천적 없음’이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스하고 풍요로운 모리셔스 섬에서 도도새는 물아일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을지 모른다. 발밑엔 먹거리가 쌓여있고 눕는 곳이 잠자리인 세상. 인간의 선박이 처음 섬에 당도하고, 잔혹한 인간들이 방망이로 자신들을 때려잡을 때도 도도새들은 영문을 몰랐을 게 분명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도도새는 멸종했다. 도도(Dodo)는 포루투갈어로 ‘바보’라는 뜻이다.

21년 전의 나 역시 일종의 도도새였다. 능력은 없고 영문을 모르는, 자괴감의 손쉬운 먹잇감. 중학생이 지나면 끝날 거란 내 전망과 달리 자괴감은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쭉쭉 이어졌다. 도도새 꼴이 날 뻔한 그때, 나를 구해낸 건 세상 바깥의 존재들이었다. 우울한 나를 사랑해준 여자친구, 우울한 내 곁에 있던 친구, 우울한 나를 능력 있다 인정해준 선배.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은 대다수 인류와 달리 자신만은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나는 차차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Illustrator 김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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