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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07. 2016

수줍은 기자의 소셜 파워 충전기

낯가림이 심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40대 형사라고 상상해보자. 때는 금요일 새벽 2시, 장소는 서울 남부 경찰서. 야간 당직을 맡은 당신은 온갖 종류의 손님(?)들로 번잡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택시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바람에 경찰서로 끌려온 취객이 있는가 하면, 오토바이를 훔쳐 몰다가 잡힌 사이코패스 꼬마도 있다. 이놈은 오토바이에서 내린 순간 “아저씨, 저는 이 오토바이를 방금 처음 보았습니다”라며 정색했다. 그 덕에 당신은 오토바이 지문까지 떴다.

멍청한 짓거리를 대체 몇 년이나 더 해야 할지. 그 와중에 누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건다. ‘저…기 형사님 오늘 무슨 사건이 있지 않나요…” “바빠요. 저리 가요.” 꼴 보기 싫은 신입 기자다.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온종일 맴도는 신입 기자들의 특징은 본디 터무니없는 뻔뻔함이다. 천연덕스럽게 말 붙이고, 농담하며, 동료끼리 야식 타임엔 슬며시 다가와 한 자리 차지한다. 형사님 형사님 하며 친근한 척 물어보는데,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밉상이지만 마냥 내치기도 어렵다.

하지만, 잔뜩 주눅이 든 저 키다리 숙맥만큼은 예외다. 얼마든지 내칠 수 있다. 며칠 전 한밤중엔 난데없이 치킨 한 마리를 들고 야근실 앞을 어슬렁대는데, 친해지려는 수작이 빤히 보여 불쌍한 한편, 싫은 마음이 더 들어 매몰차게 대해버렸다. 뒤돌아 멀어지는 모습에 마음이 짠해졌다. 숙맥을 앉혀 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는 기자와 맞지 않는 것 같아.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어때.”

물론 숙맥 기자는 과거의 나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신입 기자들의 취재 프로세스를 설명하자면
(1)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넉살 좋게 사람들과 친해진다.
(2) 인맥을 바탕으로 자기 구역에 일어난 사건을 알아채 선배에게 보고한다.
(3) 선배의 지시에 따라 취재에 나선다.

수줍음이 유독 심한 나는 1단계부터 실패하는 바람에, 매일 밤 “선배, 오늘은 별사건이 없습니다”로 일관했다. 내가 출입하는 동안 모르고 지나친 사건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장자연 성 상납 강요 사건, 구룡마을 철거 사건, 전여옥 폭행 사건 등등.

청와대 보좌관 성매매 사건이 벌어져 모든 기자가 취재에 열을 올리던 시각, 나는 남부 경찰서의 당직실에서 묵묵히 치킨을 뜯고 있었다. 선배는 나를 강아지에 비유한 후, 그럴 거면 기자 짓은 왜 하느냐는 타당한 물음을 던졌다.

기자가 되려는 이들은 크게 2종류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려는 ‘정의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밖에 없어 기자를 택한 ‘글파’. 양쪽 모두 큰 실수인데, 정의파가 언론사에 들어올 경우…이건 설명이 길어지니까 패스하자.

‘글파’로 넘어가서, 여러분도 알겠지만 중고등학교 때 ‘잘 나가는’ 애들은 주로 밖에 나가서 논다. 친구들이 무리지어 다닐 때 슬쩍 빠지는 비리비리한 수줍음쟁이들이나 책 ’따위’를 읽는다. 이런 친구들이 대학에 와서도 글을 쓰게 되며, 운 나쁜 몇몇은 심심한 방학의 어느 날, ‘그래 기자나 해야겠어’라는 크나큰 오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경찰 아저씨와 선배의 충고를 듣고, 일간지 기자를 그만뒀다.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여차여차 다시 잡지 기자를 하게 됐다. 일간지보다는 조금 낫지만, 사람 만나는 건 매한가지다. 벌써 9년째 잡지 일을 하고 있다.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버텼느냐고 하면…
“사람을 일종의 광물로 보는 거지.” “광물요?” “현무암이나 화강암 같은 거 있잖아.”

많은 사람과 소통하면서 힘들지 않으세요? 전 힘들어요. 흑흑 울던 후배에게 내가 해준 조언이다. 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권율 장군처럼 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라. 광물 중엔 친절한 광물도 있고, 이상한 광물도 있다. 때론 불편한 광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광물은 광물일 뿐이다. 광물의 눈길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너 자신만 바라봐라.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광물은 무슨. 괜히 후배가 말 걸기에 멋있어 보이려고 광물 같은 소리 좀 해봤다. 지금도 취재원과 미팅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속이 불편하다. 언젠가는 인터뷰 전에 화장실에서 토한 적도 있다(이상하게도 토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기회가 없어 후배에게 말해주진 못했지만, 조금 더 나은 사고방식을 준비했다. (1) 세상엔 남보다 더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2) 예민하기에 사람들의 행동에서 많은 것을 읽어낸다. (3) 많은 만남은 과도한 자극을 주고, 예민한 사람들은 지치게 된다.

충분히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논리에 따르면, 나 같은 수줍음쟁이는 감성이 발달한 사람이 되는 터라 기분도 좋다. 무엇보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졸지에 둔감한 멍청이가 되는 꼴이 특히 마음에 든다. 사실 미국의 유명 심리학자 일레인 N. 아론 교수가 말한 이론이다.(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책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을 읽어보도록)

그나저나 실제로 우린 그렇지 않은가.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저녁 만남을 청했다가 머뭇거리는 기미라도 보이면 “아냐. 가만 보니 해야 할 과제가 있었네. 아하하. 내가 왜 잊어버렸지”라며 무마한 경험. 뛰어난 관찰자인 우리는 인간사회의 작은 부분도 예민하게 알아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게 모두 우리가 똑똑해서 그랬다니 그야말로 훌륭한 논리다.

끼리끼리 논다고 주변엔 선천적 수줍음을 후천적 외향성으로 숨긴 친구들이 꽤 있다. 무대 위에서 끼 부리고, 라디오 MC도 했던 음악인 친구는, 1년에 6개월 정도 아무도 안 만난다. “뭐해?” “혼자 밥 먹어” “뭐해?” “무등산 타고 있어. 혼자야.”

섭외도 곧잘 하고 취재 실력도 뛰어난 잡지기자 후배는 1년에 2번 홀로 긴 여행을 떠난다. 회사에서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다. “이건 제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여백이에요”라며 잡지 기자답게 폼나게 말했다. 함께 있음에 쉽게 지치는 이들은, 그러나 홀로 충전하고 오면 다시 전처럼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그것을 가사와 기사에 녹여낸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갈 에너지, ‘소셜 파워’를 충전해오는 셈이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게 피곤해요. 하지만 혼자 있는 건 외로워요.’ 흔한 딜레마 속에 놓치는 건, 사실 우리가 진짜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란 진실이며, 혼자만의 시공간을 통해 소셜 파워를 충전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비밀이다.

‘더 이상 사람 안 만나기. 최대한 조용히 2015년 보내기’ 다이어리에 다짐을 끼적인 건 지난해 여름. 인간관계에 지친 나는 제주도 협재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협재의 메인 바닷가 오른편 끝 카페를 지나면 작은 백사장이 나온다.

백사장엔 리트리버 한 마리가 청년이 던지는 원반을 받으러 뛰어다닌다. 다른 한쪽엔 수영복 광고 촬영팀이 있다. 포토그래퍼 앞에서 가슴 큰 두 여성분이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한다. 쏴아쏴아 파도소리가 들리고 머리가 깨끗해진다. 바다, 하얀 모래, 파도, 리트리버, 가슴.

3일째 그러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고요한 천국에서 필요한 건 물론 인스타그램이지.’ 바다를 배경을 동영상을 찍어서, ‘홀로 있는 게 좋다. 제주 협재’라 쓰고 공유하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까톡”이 왔다. ‘너 제주도 왔어? 왔으면 만나자’ 서울에서 포토그래퍼로 일하던 친구다. 몇 번 본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란 느낌이 있었다. 서울에 좀처럼 올라오지 않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잘됐다. 카톡으로 답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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