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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07. 2016

브로콜리 말하길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절대 음반이 있지요.

‘절대 음반’이란 말을 아시는지? 절대 마법을 선사하는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처럼, 듣는 이 마음속 응어리를 마법처럼 녹여내는 음반을 절대 음반이라고 칭한다.


세상 사람들에겐 자신만의 절대 음반이 딱 한 장씩 있는데 모두 그걸 발견하는 건 아니다. 운 좋은 소수만이 자신의 절대 음반을 찾게 된다. 멜로디? 가사? 그 모든 게 버무려진 울림 때문일 것이다. 음반의 울림과 한 사람의 울림이 기적적으로 일치할 때 절대 음반은 어둠 속 한줄기 빛처럼 마음에 푹 꽂히는 거라고 추측된다.
 
나의 절대 음반은 2010년 세상에 나타났다. 제주도 사려니숲길 깊은 곳 벼락을 맞아 갈라진 바위 터에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CD 한 장이 발견됐다, 면 무척 멋있었겠지만, 현실은 조금 소박하다. ‘미러볼 뮤직’이란 음반사가 의뢰했고, CD 공장 컨테이어 벨트에서 팡팡 찍혀 나왔다. 감청색 물방울이 프린트된 앨범 재킷 왼쪽 위엔 알듯 말듯 한마디가 적혀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
 
난 여전히 CD를 구매해 듣는 ‘원시인’이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가수 이름을 메모한 후 음반 가게를 찾아가 돈 주고 산다. ‘브로콜리 너마저’는 1집 <앵콜요청금지>부터 충분히 좋았다. 일요일 오전 샐러드 씹으며 듣기에 딱이다. 듣다 보면 인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분이 들면서 머리가 맑아진다. ‘춤’으로 시작해 ‘앵콜요청금지’까지 듣고 ‘보편적인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끈다. ‘보편적인 노래’가 싫은 건 아닌데 오전에 듣기엔 조금 과한 감이 있다.


2집 <졸업> 역시 그러한 느낌인 줄 알고 확인도 없이 구매해 일요일 아침 틀었는데… 절대 음반이었다! 노래 한 곡 한 곡 내 밑바닥과 이어졌다.
 
정작 힘겨운 날엔 우린 전혀 상관없는 얘기만을 하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도 난 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중-
 
내게도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결혼 초기 이야기다. 집 구매, 아내의 유학 등으로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쓴 탓에 우리는 경제난을 겪었다. 대출 이자를 한 달 정도 못 갚은 일도 있다. 아내는 나름대로 마음을 잘 추슬렀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돈 부족을 경험치 못한 난 적응이 힘들었다. 대학생 때 용돈 한 달에 100만원.


직장생활하면서도 나 혼자 먹고 쓰기 부족함 없는 정도로 벌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외벌이에 대출금도 갚아야 한다. 생활비도 적잖이 든다. 내게 남은 돈이 얼마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이때 처음 알았다.
 
아내는 알뜰한 편이지만 취미가 백화점 구경이다. 이거저거 예쁘다며 윈도우 쇼핑하는 걸 좋아한다. 자꾸 같이 가자고 하는데 난 내가 사 줄 수도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원래 백화점을 싫어한다. 백화점 들어가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말했다(이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지금은 진짜 머리가 아프다). 아내는 그래도 자기와 돌아다니면 좋지 않으냐며 매주 백화점 행을 요청했고 난 그때마다 화를 냈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사 줄 수 없는 상황에서 백화점 가는 게 싫어. 내가 능력 없게 느껴지는 게 슬프다고’라고 말했으면 쉽게 해결됐을 걸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했다. 다시 부유해진(?) 지금에야 편하게 얘기하지만, 당시엔 이렇게 고민하는 내가 찌질하게 느껴졌다. 대신 난 “요즘 우울하다” 따위의 전혀 상관없는 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내 속마음을 이해해주길 원했다. 정작 힘겨운 날 나는 왜 그리 상관없는 얘기만을 해왔는지.
 
나의 말들은 자꾸 줄거나 또다시 늘어나.
마음속에서만 어떤 경우라도 넌 알지 못하는
진짜 마음이 닿을 수가 있게 꼭 맞는 만큼만 말하고 싶어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중-
 
‘외모나 언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연애를 잘 \하는 이유는 자연스러움과 절실함이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박하면 어색해진다.’ 어느 남성 잡지에 나왔던 문장이다. 읽으며 딱 그렇다고 생각했다. 난 평소 인간관계를 잘하는 편이다. 낯선 사람과 비교적 빨리 친해진다. 하고 싶은 얘기도 정확하게 전달한다. 상대가 힘들 땐 묵묵히 곁에 있을 수 있다. 쿨한 모습을 유지하는 법도 안다.
 
하지만, 상대에게 푹 빠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에 대한 마음을 주체 못 하고 나의 말들은 엉망으로 엉키기 시작한다. 언젠가 머리 짧은 빼빼 마른 여자애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때, 무척 사랑했던 전 여자 친구를 떠나보낼 때 내 말들은 자꾸 줄거나 또다시 늘어났다.


꼭 해야할 말은 침묵으로 갈음하고, 감정의 찌꺼기가 섞인 잔소리를 간헐적으로 내뱉는 바람에 오히려 상대를 멀어지게 했다. 절박했기에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했다. 진짜 마음이 닿을 수가 있게 꼭 맞는 만큼만 말했으면 좋았을걸.
 
말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에 남아 나는 자꾸만 잠들 수 없었죠
어쩔 수 없어요, 결국 당신 마음의 문제이니까
결국 나의 마음의 문제이니까.
-‘마음의 문제’ 중-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주관적인 탓이다. 어떠한 논리도 노력도 거기선 작용하지 않는다. 안 되면 안 되는 것이고, 되면 되는 것일 뿐. 결국 ‘당신’ 마음의 문제이니까. 하지만 만약 진짜 마음이 통하는 기적적인 순간이 있다면 그건 침묵을 통해서가 아닐까, 라고 제멋대로 추측한다. 긴 침묵의 시간 동안, 내 마음의 울림을 간직하고 있다면 어느 순간 상대의 울림이 나와 같아질 때가 오지 않을까. 600만분의 1 정도의 확률로.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결국은 그건 나의 마음의 문제일 테다.
 
2006년 9월 4일: 신촌, 언론사 스터디에서 그녀를 처음 만남.


2006년 12월 1일: 그녀는 자신이 지갑을 두고 왔다며 밥을 사 달라고 요구함(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밥 굶는 건 안될 일이기에 밥을 사줌.


2006년 12월 10일: 일본 여행을 다녀온 내게 그녀는 자기 선물 사 왔는지 물어봄(너도 나를 생각해?). 사 오지 않았기에 사 오지 않았다고 대답함. 그녀의 표정 기억 안 남.


2007년 2월 28일: 그녀가 내 이름이 쓰인 생일 케이크를 건넸으나 대수롭지 않게 받았음. 그녀는 갑자기 울었는데 이유는 안 알려줌.(나는 너를 좋아해. 네가 나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슬퍼)


2007년 4월 1일: 만우절, 그녀거 외국으로 이민 간다며 거짓말함(이게 마지막이야. 너 정말 나를 안 좋아하는 거지?). 냉큼 속아버린 난 2006년 9월 4일부터 마음에 담아왔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말을 건넴. “나 사실 너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ps 언니네 이발관 4집도 매우 좋아합니다. '태양없이'는 인생 노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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