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입원생활과 출산

출산만 잘 끝나면 더 바랄 게 없었는데

by 오늘

30주가 지나자 배가 숨 막히게 불러오고 발이 너무나 퉁퉁 부어 크록스밖에는 신을 수 없어졌다. 이제 슬슬 출산 시기를 정하지 않을까 했던 무렵의 어느 진료날 둘째(딸)가 성장지연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은 아이와 일란으로 연결됐던 첫째만 걱정했었는데 갑자기 둘째가 문제라니, 또 가슴이 철렁했다. 다시 일주일 간격으로 대학병원에 다니다가 33주부터는 아예 입원을 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둘째가 계속해서 성장을 잘 못 하고 있어서, 아기의 상태는 물론 아기에게 연결된 여러 혈류의 흐름을 매일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목표는 3주간 입원을 하며 무사히 시간을 보내고 36주에 낳기. 예상치 못한 고난이 또 생겨 속상했지만 임신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잘 버텨보자 하고 금방 마음을 고쳐 먹었다. 입원 삼 일 전부터 남편과 먹고 싶었던 것들을 먹으러 다니며 열심히 마지막 자유를 누렸다.


생각해 보니 처음 겪는 입원이었다. 30년을 넘게 살면서 입원을 한 번도 해보지 않다니 참 분에 넘치게 운 좋은 삶이었는데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다 싶기도 했다. 처음 겪는 입원생활은, 그래서인지 정말 힘들었다. 5인실은 불편했고, 더웠고, 환자들이 거의 다태아를 품고 있는 만삭의 임산부라 그런지 밤마다 코골이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졌다. 나는 잠귀가 밝아서 밤에는 거의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새벽 다섯 시부터는 태동검사를 위해 병실 불이 켜졌고, 배부른 산모들은 눌리는 방광 때문에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당연히 나도) 병실 안은 한시도 조용할 수가 없었다. 피폐한 막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담당 교수님이 거의 매일, 진료가 없는 날도, 주말에도, 어느 날에는 학회를 다녀오느라 늦었다며 양복 차림으로 한밤중에도 나오셔서 내 뱃속의 둘째만은 확인하고 가셨다. 둘째는 계속해서 더디게 자라고 있었지만, 성장속도와는 대비되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첫째와 함께 쓰는 그 좁은 공간에서도 시시각각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태아 심음 검사를 할 때면 매번 달라지는 둘째의 심장 위치 때문에 간호사 선생님들이 애를 먹었다. 이렇게 잘 움직이고, 게다가 좋은 의사 선생님이 돌봐주시기 때문에 둘째가 괜찮을 거란 믿음을 갖고 그 시간을 그나마 버티게 됐다.


좁은 병동 안에서 낮과 밤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는 채 어찌저찌 겨우겨우 2주 정도를 보냈다. 수액을 맞기 위해 연결한 줄 때문에 양팔 여러 군데의 핏줄이 다닥다닥 터지고, 피곤과 건조함으로 인해 얼굴이 다 터서 나는 얼핏 보면 말이 아닌 몰골 위에 어울리지 않게 볼터치를 진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일주일만 더 버티자 하고 있는데,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둘째의 초음파를 유심히 보시던 교수님이

"다음 주 화요일에 수술합시다" 하셨다.

36주가 되는 날은 목요일이었다. 아무래도 둘째의 성장속도가 영 불안했고, 아이들을 조금 빨리 꺼내서 키우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셨나 보다.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철없게도 걱정보다는 신이 나는 마음을 참지 못했다. 들떠서 곧장 남편에게 소식을 전했다. 곧 이 입원 생활이 끝난다! 나 출산하고는 꼭 1인실 잡아줘!


그런데 그날 밤, 너무나 설레하는 엄마의 맘을 느끼고는 우리의 효자와 효녀가 기대를 얼른 충족시켜주고 싶었나.. 갑자기 진통이 찾아왔다. 처음엔 가진통인 줄 알았는데 점차 침대 난간을 붙잡고 몸을 벌벌 떨게 되는 고통이 일었다. 진통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체크하다 보니 곧 '짐을 챙겨 병원에 가세요!' 멘트가 떴다. 다행인 것은 나는 이미 병원이었고, 불행인 것은... 하필이면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었다. 겁나는 마음에 침대맡의 콜 버튼을 눌렀다. 너무 아프다고, 진통 어플에서도 진짜 진통이라고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담당 교수님을 불러주겠지? 밤중에 나오시게 해서 죄송하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간호사들은 아무도 진진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고, 진짜이더라도 초산 산모가 이제 막 진통을 시작했다면 어차피 경부가 열릴 때까지는 한참 남았을 것이기에 금요일 밤인 이 시점에 굳이 벌써 의사를 부를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절망스럽게도 그 밤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참고 버티는 거였다. 진통제를 맞긴 했지만 산모가 맞을 수 있는 약한 진통제여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그냥 계속 아팠다. 진통이 한 번 지나가면 너무 꽉 쥐어 저릿해진 손을 문지르며 두려움 속에 다음 진통을 기다렸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설명을 잘 못 했나 싶어 몇 번 더 간호사 콜을 눌렀다. 점점 더 어쩔 줄 모르게 아파오자 진통과 진통 사이에 간호사 데스크로 직접 가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진통제라도 더 놔주시면 안 돼요?"

"그거 효과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생각해 보니 조금은 효과가 있는 것도 같아요"

스스로가 진상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도 서글퍼졌다.


남편은 자다가 새벽에 연락을 확인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왔다. 하필 그때쯤에는 화가 잔뜩 나 있어서 남편에게는 안된 일이었다. 남편의 잘못도 아닌데 혼자 견딘 시간이 괜히 서러워서 내 등에 얹는 손을 자꾸 뿌리치며 그에게 쓸데없는 죄책감을 안겼다. (불쌍하고 착한 남편은 나중에 그때가 살면서 가장 무력했던 순간 중 하나라고 슬픈 눈으로 회상했다. ㅋㅋ) 그래도 이제 남편도 함께 내 고통을 호소해 줄 수 있었다. 남편도 데스크로 자꾸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거야 별반 없었지만 그래도 혼자 진상 환자였는데 이제 함께 외치니 덜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모두의 고통 속에 그렇게 아침이 밝았고, 이대로 주말 내내 버텨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에 이제는 체면 다 내려놓고 울고불고 애걸을 하자 드디어 간호사선생님이 내진을 했다. 내진이 무척 아프다고 들었는데 진통이 너무 아파서인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하시더니 담당 교수님을 호출하겠다 하셨다. 간밤의 내 고통 호소를 꾀병으로 생각하신 건가.. 고통과 억울함과 함께 크게 몰려오는 안도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교수님을 만나기까지는 또 몇 시간이 걸렸고, 수술을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이미 경부가 꽤 열려 자연분만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죽은 아이까지 셋을 자연분만으로 낳는 것에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둘째가 나오다가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 수술하기로 했다), 수술에 관한 설명을 듣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수술장이 준비되기까지 또 시간이 걸렸다. 수술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태어날 아이들의 처치를 해 주실 소아과 교수님 두 분 중 한 분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또다시 병동으로 올라가 한 시간을 기다리며 보내고(이때 또 너무 절망스러워서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왜 토요일에 나오려고 이러는 거니 얘들아... 애꿎은 애들을 원망했다.


그래도 드디어! 수술방 문이 열렸다. 그 다음부터는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밝은 빛과 여러 의료진 가까이로 내 침대가 옮겨졌다. 수술 침대로 옮겨서(누가 들어줄 줄 알았는데 내가 옮겨가는 거였다. 누운 채로 들썩들썩) 내 배에 소독약 같은 게 잔뜩 발리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마취과 선생님이 인사를 하셨다. 담당 교수님이 들어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숨 깊게 쉬세요' 하는 말과 함께 매캐한 공기가 느껴졌고 심호흡을 두 번 정도 했던 것을 마지막 기억으로 나의 행복하고 고통스러웠던 임신 생활은 마침내, 끝이 났다.


아랫배가 뜨끈한 채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느낀 첫 번째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드디어 이 진통에서, 배뭉침에서, 한 시간마다 소변을 보러 가는 생활에서, 엉치뼈가 뒤틀어진 느낌에서 해방된 것이다! 야호 이제는 당분간 화장실도 안 가고 여덟 시간 동안 자야지!(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야무진 꿈이었다) 깨어났음을 알리기 위해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렀는데 아직 입이 잘 안 열려서 실제로 나오는 음성은 스새임.. 스새임.. 이런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응답해 주었고, 나는 그 어눌한 발음으로,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는 대사를 쳤다.


"애들 귀여워요?"


웃음과 함께 '애기들은 물론 귀엽죠'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