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회사까지 지하철로 1시간 30분 정도. 집에서 나가는 시간까지 넉넉히 잡으면 2시간 20여분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방을 구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걸 염두에 두고 면접 본 회사였으니까.
출근일이 꽤나 급해서 친구 집에 신세를 지며 방을 구하러 다녔다.
'오피스텔 지구'라 역부터 다음 역까지 한 줄이 쫙 오피스텔인 곳.
부동산은 눈만 돌리면 찾을 수 있다. 직방, 네이버 부동산, 다방 등을 이용해 집을 이리저리 골라보고 부동산에 메시지 보내고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인터넷으로 '오피스텔 구할 때 확인 사항, 원룸 주의할 점, 오피스텔 계약 주의사항' 이런 것들을 검색해 봤다. 이미 집을 구한 친구한테도 물어보고, 회사 선배들한테도 물어보고.
처음 오피스텔 매물을 보러 가서 나는 뜨악했다.
너무 좁았다. 정말 '손바닥 만하다'는 말이 비유가 아닌걸, 싶었다.
이런 좁은 데서 어떻게 살지? 본가의 내 방보다 좁은 것 같은데? 현관은 두 사람 서있기가 벅차고, 세입자의 꽉꽉 들어찬 물건들로 숨쉬기가 갑갑할 지경인 방이었다.
몇 평인지, 해가 어디로 드는지, 방음은 잘 되는지, 수압은 강한지, 곰팡이가 있진 않은지, 벌레는 없는지, 방 상태는 어떤지, 옵션은 뭐가 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집주인은 어떤 분인지...
엇비슷한 방들을 보면서 하나하나 비교를 시작했다. 나는 약간 어른이 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어느새 커서 이렇게 독립을 한다고 방을 보러 다닌다? 나도 이제 어른이지?
이렇게 열댓 개 넘는 방을 보러 다녔다. 매일 같이 퇴근 후에 약속을 잡고, 주말에는 서너 개씩도 봤다.
이 근방 오피스텔은 거의 다 가봤다.
그러다 어떤 부동산에 매물을 보러 갔는데, 들어갈 때부터 심상찮았다.
전화 통화의 목소리로 예상했을 때는 키가 크고 안경을 쓴 샌님 같은 이미지가 연상 됐었는데, 의외로 구릿빛 피부의 팔에 꽉 들어찬 문신을 한 내 또래의 사람이 있었다. 외모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말자고 스스로를 되뇌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그 현란한 문신에 위축이 됐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도취되어 있었지만, 중개인들의 눈엔 아주 햇병아리로 보였을 것이다.
아마도 호구 잡기 딱 좋겠다,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맞긴 했다. 나는 나이만 먹었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서른이 되도록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은 여행 말고는 없었기에 방을 구하는 일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솔직히 내 집마련이니 청약이니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보니, 반전세니 보증 보험이니 임대차 계약이니 이런 단어들도 낯설었다.
그래서 그 실장인지 과장인지는 나를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나이를 듣더니 너무 어려 보인다며, 동안이라고 마스크를 내려보라고도 했다. 내가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자 음료를 권했다. 끝끝내 사양하다 한 모금 마시자 그 찰나에 "마스크 내리니까 더 동안이네." 라며 그때부터 갑자기 반말을 섞어 쓰기 시작했다.
매물을 보러 가서 "여기가 이 근방에서는 제일 신축이라 깨끗해요. 어때, 좋지? 친구가 봐도 딱 알 거야."
"가격은 좀 있는 편이긴 한데, 평수로 따지면 이것도 싸게 잘 나온 거지~ 내가 친구니까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면 그 양아치 같은 말투와 은근한 어떤 뉘앙스를 풍기는 농담들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전에 본 매물들보다 3평 정도 컸다..)
그래서 계약을 진행하려 하니, 갑자기 은행에서 대출을 80% 받아야 하는데 어쩌고 했다. 그래서 신용등급을 조회하고 어쩌고 저쩌고.
무슨 말인가? 나는 전세 보증금을 낼 돈이 있었고, 처음부터 대출 없이 현금으로 진행 가능한 매물을 원했는데.
그렇게 말했더니 "아, 그건 친구가 잘 모르니까~ 내가 처음부터 얘기를 안 했던 거지. 설명해 줘도 잘 몰라~"
갑자기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그러면서 부모님은 설명하면 이해하실 테니 부모님과 통화하겠다고 했다.
아빠는 통화를 마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는데.. (아빠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내 집을 계약하러 왔고, 입주도 내가 할 것인데 왜 나에게 설명하지 않고 나의 부모에게 설명하는 걸까?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같아 보여도, 이해를 하든 말든 그건 내 몫이고 설명은 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약간의 굴욕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 좀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애 같아 보였나.
그래서 일단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쿨하게 알았다고 하더니 예의 뉘앙스를 풍기며 또 친구네 집까지 차로 데려다줬다. 프로페셔널한 건지..
그 이후로도 이런 스타일의 중개인을 몇 만났다. 주로 나이대가 조금 젊은 남자들이었는데 본인과 친하게 지내면 좋은 정보를 주겠다는 둥, 귀엽게 생겼다는 둥, 커피 한 잔 하겠냐는 둥의 말들을 들었다.
영업 전략인지, 추파인지 경계가 아슬아슬한 말들이었다. 통화를 해보고 여자가 받으면 마음속에 안심이 피어날 정도였다.
그 아슬함에 지쳐가던 차에 친절하면서 프로페셔널한 분을 만나서 마음에 드는 방을 계약했다.
필요한 말만 하시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말하면 곧바로 다른 방을 보여주셔서 믿음이 갔다.
잔금을 치르던 날, 엄마와 같이 부동산을 방문했는데 그동안 묵묵하시던 그 중개인이 엄마에게 한 마디 했다.
"따님이 집을 엄청 꼼꼼하게 잘 보시더라고요. 요즘 젊은 친구들 중에 그렇게 꼼꼼한 분 처음 봤어요."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의 기분'을 조금 느꼈다. 그건 나 혼자 생각하고 도취되는 게 아니었다.
그건 또 다른 어른의 인정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조건부의 느낌이랄까.
서른 즈음되면 어른인 줄 알았다. 프로페셔널하고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될 줄 알았다.
현실은 부동산 중개인에게 호구 잡히고 추파를 받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다행히 호구 잡히지 않고 원하는 공간을 얻었고, 계약이니 전입신고니 난생처음 하는 것들을 해냈다. 당시에는 회사일도 바쁘고 정신없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내게 어른의 영역은 여전히 너무나 멀고 아득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살아내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