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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Apr 29. 2023

쉽게 먹어온 것들

마트에 봄나물이 한창이길래 '제철 채소는 먹어줘야지' 라며 호기롭게 사들고 왔다.

시금치, 무, 미나리, 달래.

싹싹 무쳐서 비빔밥 해 먹으면 맛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3일쯤 지났나... 시금치를 무치려고 보니 물러 있었다.

잎 여기저기 물렀고, 냄새도 이상했다. 나는 시금치가 그렇게 빨리 무르는지 몰랐다.

무른 잎을 떼어내고 성한 것을 고르는데만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 데치고 보니 한 주먹밖에 안 된다.

엄마의 시금치나물을 생각했다. 그건 양껏 먹어도 줄지 않았는데, 엄마는 대체 몇 단의 시금치를 다듬고 데치고 씻고 무친 걸까.


제주 무라고 해서 아주 튼실한 걸로 골라왔는데, 칼을 꽂는 순간 손목이 찌릿했다.

채칼이 없는데 채를 썰어야 하니 어떻게 썰어야 좋을지 한참 고민했다. 채칼도 없으면서 무생채를 하겠다고 무를 사온 내가 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무는 또 시금치와 다르게 조금만 한다고 했는데도 채를 썰고 보니 꽤나 많아졌다.

고춧가루, 식초, 설탕, 소금 정도를 넣고 무쳤는데 뭔가를 자꾸 더해봐도 엄마가 해주던 맛이 아니다.

엄마한테 물어봐도 유튜브 영상을 봐도 들어가는 조미료는 같은데, 퍼즐 한 조각 빠진 것 같은 맛이었다.


무생채가 너무 많아서 내내 비빔밥만 먹었다


얼마 전에 친구랑 '미나리 삼겹살'을 먹고, 미나리가 너무 맛있길래 "봄이 왔구나" 싶었다.

그래서 단 미나리를 한 단 사 왔다. '단 미나리'와 '돌 미나리'의 차이점을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엄마가 아주 깨끗하게 여러 번 씻으라고 해서 그렇게 씻으려고 보니 세상에나.. 왜 이렇게 더러워?

미나리가 더러운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더러운 줄은 몰랐다. 씻어도 씻어도 잔잔한 뭔가가 계속 나와서 이거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7번을 씻었는데 생각만큼 깨끗하진 않았다. 손이 시릴 정도였다.


달래는 아주 잔잔해서 쉬울 줄 알았는데, 그 잔잔한 게 껍질은 또 하나씩 다 가지고 있어서 하나하나 다듬기가 고역이었다. 하도 목을 숙이고 있었더니 뒷목이 뻐근해지고 허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한 번 사먹고 지긋지긋해진 미나리





전부 다 내 손으로는 처음 사보는 것들이었다. 태어나 처음 사보고, 씻고, 다듬고, 데치고, 무쳐봤다.

이렇게나 많은 과정들이 있는 줄 몰랐다. 엄마가 그렇게 하는 걸 보면서 자랐지만, 쉬워 보여서 쉬운 줄 알았다. 나는 그냥 쉽게 먹어온 거였다. 엄마가 정성과 사랑으로 다듬고 씻고 무친 것들을 그렇게나 쉽게.


30여 년 살면서 그렇게 다 쉽게 먹어왔겠지. 엄마가 왜 그렇게 부엌에 오래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반찬은 품이 많이 든다. 가장 쉽게, 가장 흔하게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에 줄줄이 나오는 것들이지만 사실 메인보다도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소박할수록 맛을 내기가 힘들다. '엄마의 손맛'이라는 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 엄마가 해주는 반찬들의 레시피를 다 기록해 둔다 해도 나는 절대 엄마의 맛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엄마의 손맛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쉽지 않게, 아주아주 어렵게 모든 맛을 마음에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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