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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May 04. 2023

새벽의 방문자들


자취방으로 이사오던 날, 짐 정리를 다 마치고 우리 엄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철물점에 가는 거였다.

오피스텔 현관문에 잠금장치가 없어서 집주인의 허락을 받고 3만 원짜리 잠금장치를 달았다.


어쩐지 허술하게 보이지만 나를 안심시키는 잠금장치


나는 겁쟁이인 것에 비해 (주사, 새, 높은 곳, 피, 곤충 등을 무서워한다) 범죄에 대한 겁은 별로 없는 편인데, 워낙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도시에 살아 무감각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몸을 쓰는 일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취객 정도는 나의 힘으로 무찌를(?) 수 있다고 오만한 생각을 하며 살아오기도 했다.


자취를 하면서도 혼자라 무섭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는데, 나에게 겁을 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생겼다.



에피소드 1)

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누군가 현관문 초인종을 눌렀다.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나는 아직 친구도 초대한 적 없으며 배달도 시켜 먹지 않아서 초인종 소리를 처음 들었다. 화면에는 오토바이 헬맷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내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초인종을 또 한 번 눌렀다. 그리고 문을 주먹으로 쾅쾅쾅 두드렸다.


"누구세요?"

"배달"

"안 시켰는데요"


내가 안 시켰다고 하자 기사는 바로 몸을 돌려 그대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 손에 정말 치킨이랄지 피자랄지 들려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냥 '배달'이라니... 배달이요, 배달입니다, 치킨이요 이런 것도 아니고

배달, 배달, 배달, 그 두 글자가 이상하게 찝찝했다.

내 상식으로 생각해 봤을 때, 배달을 하러 왔는데 안 시켰다고 하면 호수를 다시 확인해 본다거나 주문서, 휴대폰 등을 확인해 봐야 하지 않나? 안 시켰다고 하자마자 그냥 뚜벅뚜벅 걸어갈 건 뭐람.


그날 밤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침에 출근하며 혹시 현관문에 뭔가 표식이 있나? 생각했다.

예전에 혼자 사는 사람의 집은 어떤 표시를 해둔다는 도시괴담이 생각나서.

여기 오피스텔은 거의 1인 가구가 많으니까 내가 혼자 사는 여자라는 걸 알았겠지. 목소리를 좀 더 걸걸하게 낼 걸 그랬나. 관리실에 CCTV를 확인하고 싶다고 했는데, "배달 기사겠지, 그런 걸로 CCTV 못 돌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귀찮은 말투에 괜히 예민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머쓱했다.


그 뒤로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마다 두근거렸다. 누군가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현관문이 미처 닫히지 않은 사이에 손을 밀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잽싸게 문을 닫고, 바로 잠금장치를 걸어 잠근다.



에피소드 2)

한 번은 누군가 공동현관의 벨을 눌렀다. 나는 자는 중이었고, 희미한 의식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인터폰 화면에 비친 남자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아저씨였고, 술에 취해 몸을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다른 호수를 눌러야 하는데 잘못 누른 거겠지 싶었지만, 공동현관은 열어주지 않고 다시 잠을 청했다.

역시나 잠은 잘 오지 않았지만.



에피소드 3)

또 한 번은 한참 자는 중이었는데, 누군가 내 현관문 초인종을 또 눌렀다.

나는 엄청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비몽사몽 하던 중이었는데, 그 사람이 내 현관문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뜩 들었고, 인터폰으로 확인해 보니 젊은 남자였다.

술에 취해서 다른 집으로 착각했나? 그럼 자기 집이면 처음에 벨은 왜 눌렀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겁을 줘서 쫓아야 하나? 남자인 척 말을 해볼까? 저 사람이 내 문을 따고 들어올 가능성은 적었으나, 만에 하나 비밀번호를 맞추고 들어온다면? 저 잠금장치가 끊어질 수도 있을까? 칼을 들고 있어야 하나? 그럼 정당방위가 되나?


머릿속에서 이미 피로 얼룩진 복도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는데, (상상력이 과한 편이다) 그 남자는 체념한 건지 뭔가를 알아챈 건지 비밀번호 누르기를 포기하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여기는 엇비슷한 오피스텔이 줄줄이 있는 '오피스텔 지구'다.

그러니 누군가는 건물을 헷갈릴 수도, 층수나 호수를 헷갈릴 수도 있다. 술에 취해 호수를 잘못 누를 수도 있다.

근데 왜 가볍게 '잘못 배달 왔나 보다, 술에 취했나 보다, 건물을 헷갈렸나 보다' 할 수가 없을까?

왜 남자 목소리를 내려하고, 칼을 쥘 생각을 하고, 오만가지 앞서가는 걱정을 하게 되는 걸까?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혼자 산다는 것은 이런 불안과 상상 속에 무자비하게 내던져진다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내 집에 들어오는 길이 이다지도 불안하고 무서운 걸까.

새벽의 방문자들은 제각기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이후로도 나는 잘 살고 있으니 그건 그냥 실수였겠지.

그러나 그 방문들은 내 마음속에 공포와 불안을 새기고, 어쩐지 그건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가 않을 것 같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문을 빨리 걸어 잠그는 습관이 생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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