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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May 08. 2023

우리 동네 채소가게


2년 정도 혼자 살면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횟수는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워낙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성비를 매우 따지기 때문이다.

비싼 돈 주고 시켜 먹었는데, 맛이 없는 경우를 제일 싫어한다. 그럴 바엔 그냥 내가 만들어 먹는다.

내가 만들면 일단 가성비가 좋으니 기대치가 낮고, 들인 시간과 정성만큼 애정이 생겨서 그런대로 맛있게 느껴진다.

이런 나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장보기'다.

요즘은 그냥 슈욱 둘러보고, 툭툭 담아서 쓱 결제하면 다음날 새벽에 이미 도착해 있는 아주 편리한 시대지만,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만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사는 장보기를 선호한다.

백수가 되고는 수입이 없으니 가성비를 더 따지게 되었는데 이런 나를 위한 동네 채소가게가 있다.


딱히 가게 상호명이 없기 때문에 '채소 가게'라고 부르는데, 과일도 팔고 생선도 판다.

가게 구석구석까지 들여다보면 누룽지, 젓갈, 된장, 미역 같은 것들도 판다.

웬만한 식재료는 여기서 다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채소가게의 가장 큰 매력은 '가격이 싸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극한의 가성비를 따지는 나에게 다른 단점을 다 상쇄시키는 장점이다. 단점이라고 하면 상품의 퀄리티가 조금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못 먹을 것을 파는 건 아니고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B급 정도 되는 상품들을 대량으로 구매해 와서 저렴하게 파는 것 같다.


회사를 다닐 때는 주로 퇴근 후나 주말에 방문했는데, 백수가 되고 나서는 평일 어느 시간에도 방문할 수 있게 되어 가게의 면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가게 문을 닫을 즈음에 가면 다 팔지 못한 상품을 떨이로 아주 싸게 판매한다. "한 봉지에 천 원 하는 콩나물, 두 봉지 가져가세요~" 또는 "팽이버섯 5개 2천 원인데 10개 2천 원에 드려요~" 이런 식이다. 그렇게 몇 번 떠밀려서 엄청난 양의 콩나물이나 깻잎을 해치우느라 고생했다. 1인가구에게 떨이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주말은 아무래도 손님이 더 많아서 그런지 평일에 비해 가격이 조금씩 더 비싸진다.



문을 여는 시간에 가면 식자재들이 제일 싱싱하고 질이 좋다. 근처 식당을 하시는 분들이 주 고객층이다. 그들은 상품을 집어드는 개수부터가 다르다. 오이를 박스채로 사거나 '한 근에 얼마' 하는 채소들을 무자비하게 바구니에 담는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가니 상추나 가지 같은 것들을 근으로 달아서 사야 했다. 도대체 상추를 얼마나 담아야 한 근이 되는지 가늠하기가 힘들고, 그게 저렴한지 어떤지도 잘 알 수 없어서 1인가구 장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가장 적절한 시간은 10시에서 11시 사이 정도의 시간이다. 이 때도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주 고객층은 주부들이다. 내가 사는 곳은 오피스텔 촌인데 하나의 대로변을 지나면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아마 그 아파트 단지의 주부들인 듯싶고, 대게는 60대 정도의 연령으로 보인다. 이들은 매우 친숙하게 물건을 고르고, 직원들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거신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을 유심히 들어보면 오늘 쪽파나 배추가 싼 지 비싼지 알 수 있다. 이 시간대에 가면 상품들의 상태도 싱싱하게 좋은 편이고, 직원들이 적당량을 바구니에 담아 가격표를 적어두기 때문에 내가 무게를 달아야 할 번거로움도 없다. 식당 직원들 사이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주부들 사이에서 팁을 얻는 게 좋다.


어떠한 시간대에 방문해도 일하시는 분들 전부 활기가 넘친다. 기본적으로 목청이 우렁차다. 토마토 한 바구니 3천 원, 쪽파 한 단 2천 원 등의 가격을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특유의 쪼가 묻어난 말투로 외친다. 열심히 박스를 나르고, 무게를 달아 상품을 진열하고, 가격을 매기고, 계산을 한다. 중간중간 손님들과 농담 나누기도 잊지 않는다. 그 생생함은 삭막한 회사나 조용한 내 방에서는 얻지 못할 것이라서 생경하게 다가오는 동시에 기분 좋은 설렘을 준다.


계속해서 가격을 외치고 손님을 응대하고 무거운 채소나 과일들을 나르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한데 그들은 늘 활기가 넘치고 기분 좋은 얼굴이다. 내가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면서,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옷에 먼지를 묻혀가면서도 즐겁다. 물론 내가 그들의 모든 시간을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게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지만, 노동력의 활기는 진짜였다. 그래서 나는 늘 장을 보고 나오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들은 나에게 청양고추나 사과를 팔면서 활기를 덤으로 얹어준다. 스스로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리 동네 채소가게에 장을 보러 간다. 사과를 사는 할아버지와 쪽파를 살지 말지 고민하는 아줌마를 지나 단단하고 매운 향이 나는 청양고추를 열심히 골랐다. 버섯과 당근의 가격을 외치는 직원들의 소리는 여전히 우렁차고, 많은 사람들이 파프리카 나 오이를 들여다본다. 그 북적함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다시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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