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무 May 15. 2023

청소에 미쳐버린 사연

청소광 역사의 서막

엄마 집에 살 때는 청소와 담을 쌓고 지냈던 내가, 방을 얻고 거의 한 달 내내 몰두한 것은 '청소'였다.



전 세입자는 여자였고, 본인이 있을 때만 집을 볼 수 있다 하여 저녁에 찾아갔었다.

들어서자마자 엄청나게 강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마 누군가 집을 보러 온다 하니 좋은 향기가 나라고 그런 거겠지만, 너무 심하다 싶었다.

짐이 매우 많았지만 그래도 겉보기에 깨끗해 보였다. 그전에 본 집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던 곳이라 더 좋아 보였는지도 모른다.


내일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얘기하던 전 세입자는 말을 바꿔 2주를 더 있었다.

이사 전날 중개인에게 소개받은 청소업체에 입주청소를 맡겼다.

아주머니 두 분이 오시자마자 청소를 시작하셨고, 엄마와 나는 커피를 사들고 다시 찾아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락스 냄새가 훅 끼쳤다.

근데 복도를 걸으면서 내 집에 가까워질 때 아주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 분은 화장실 청소를 하고 계셨고, 한 분은 세탁기 청소를 하고 계셨는데 경악스러웠다.

세탁기를 청소한 물이 검은색이었다. 이게 그냥 더럽다는 수준이 아니라 색깔이 검은색 그 자체였다.

심지어 내가 오기 전에 몇 번 닦아낸 건데도 그 정도라고 하셨다. 도대체 세탁기에 무슨 짓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신발을 돌려도 저것보단 깨끗할 것 같은데.


화장실도 말 못 할 수준이었고, 문제가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들이 이 근처 오피스텔 진짜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런 건 처음 본다고 하셨다.

내가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옆에서 걱정을(?) 해드렸다.

'너무 힘드셔서 어떡하죠?' '진짜 더럽게 썼나 보네요.' 등등.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엔 없네요.


두 분은 예정된 시간보다 거의 2시간을 더 청소하셨다. 그러고도 썩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들이셨다. 워낙 더러워서 내가 더 청소를 해야 할 거라고 하셨다. 엄청난 프로라고 생각했다.

"저는 다음을 위해 깨끗하게 살게요."




이사하고 나서 아무래도 찝찝해서 세탁기를 그냥 돌려보니 안에 차는 물이 점점 어두워진다.

여기에 옷을 빨 수나 있을까? 빨래를 하다가 더 더러워질 것 같은데?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회사에 적응하는 것도 지쳤지만, 퇴근만 하면 나는 세탁기 청소를 시작했다.

락스도 붓고, 청소 세제도 넣고, 식초도 붓고. 깨끗하고 소독되는 건 다 넣고 붓고 했다.

그래도 고무 패킹에선 계속해서 검은 때가 묻어 나오고, 그 검은 때가 세탁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게 눈에 보였다. 일주일쯤 되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로 산 매트리스 커버며 벗어둔 양말과 속옷들을 손빨래해야만 했다. 매일같이 청소하고 한숨 쉬고 스트레스받고 하는 나를 보면서 아빠는 급기야 세탁기를 새로 사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지 말고 새로 하나 사 넣으라고.


그나마 좀 나아졌을 때 찍은 사진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지점에서 오기가 피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그래, 네가 그래봤자 세탁기지. 언젠가는 깨끗해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은 찌꺼기가 계속 보였다


수없이 많은 청소 후 드디어 찌꺼기가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내가 못 보는 오염이 있을 수는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드디어 빨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밀려있던 빨래를 해치우던 날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전 세입자에게 딱 한 번의 딱밤을 날리고 싶었다.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청소와는 전혀 접점이 없던 내가 30년 만에 청소광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청소에 미쳐버린 조금은 슬픈 사연이고, 청소광 역사의 서막이다. 앞으로 더 험난한 청소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때 나는 몰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동네 채소가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