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
잠깐 할머니 생각을 했다. 일이 막혀서 답답하던 중에, ‘적당히 끝낼 일을 왜 미련하게 구는가?’ 하며 담배를 태운 것이 화근이었다. 생전에 당신께서 당신의 손자에게 그런 닦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미련하게’라는 단어에서 할머니에 대한 고모부의 촌평을 떠올렸을 뿐이다. 고모부는 할머니가 ‘미련하게 사셨다.’고 했다. 휴일 근무의 새벽, 출금 소식을 알리는 문자처럼 할머니 생각이 생각의 잔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할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윷을 놀거나 화투를 칠 때, “에끼나!”하고 추임새를 넣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할머니는 포커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는 표정이 있다면, 바로 그 표정으로 화투를 쳤다. 그렇다고 계산을 소홀히 하신 것은 아니다. 그 연세의 다른 분들에 비해 글도 잘 읽으셨고, 셈에도 밝았다. 언젠가는 할머니와 같이 TV로 영화 ‘어린신부’를 본 적이 있는데, 할머니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신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사실 지금은 나조차 그 영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에게 노인은 너무 먼 미래였을까, 어린 나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느 이야기에서 지혜로운 노인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언하신다거나 위로를 하신다거나 하시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저 자손들이 건강하기만을 바라셨고 그 외엔 별다른 말씀을 건네지 않았다. 할머니는 당신의 지혜로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침묵을 택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침묵만이 오롯이 남았다. 떠올려보면 할머니의 말에는 조금 특색이 있긴 했다. “그 멀쩡한 걸 왜 버린다네?”처럼 “~한다네?”하는 의문문이 많았다. 또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내게 처음으로 영어를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어릴 적 동생과 내가 뒤꼍에 계신 할머니를 부르면 할머니는 멀리서 “와이~”하고 답하셨는데, 그게 영어 why를 뜻한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가 남긴 말 중에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술은 여자 음식 아니여...” 쯤이 생각난다. 물론 할아버지의 술버릇(밤새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재우지 않고 말을 걸었다고 했다.)을 생각해보면, 남자 음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을 테다. 아무튼, 장례식 내내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할머니에게 술을 올리는 것이 퍽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
발인하던 날에, 할머니가 생전에 스스로 준비해두신 옷이 할머니를 거듭 감싸던 날에, 나는 누워계신 당신 모습이 평소보다 더 크게 보였다. 할머니께서 농사일하다가 집에 돌아와 쉬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래? 여기가 툭 튀어나왔네?” 하고 등을 짚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할머니의 허리는 서서히 굽었다. 할머니는 가끔 당신의 허리에 대한 자조를 할 때면, “꼬부랑 할매”라는 말을 썼다. 할머니가 곧게 허리를 펴고 누워계신 모습에, 나는 내세를 믿는 사람인 것 마냥 ‘이제 허리 안 아프시죠?’ 하고 말았다. 할머니의 허리는 텃밭의 콩이나 고추, 냉이나 호박잎이 되었다. 아버지가 나름대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할머니는 더이상 생계를 위해 농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끙끙대며 농사를 했다. 일 좀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려도, 할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명절에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도시로 오면, 얼른 내려가야 한다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같이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는 누구보다 힘이 넘치는 걸음걸음으로 텃밭을 오가며, 밭일을 했다. 장에 내다 팔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기 위함이었다. 나는 아마 그 마음을 평생 깨닫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장지로 가서 봉안함을 묻어드렸다. 봉안함은 흰 자기로 되어 난초가 멋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할머니가 이 함을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또 이어가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 제사가 끝나고, 할머니 댁에 친척들이 잠시 모였다. 나는 할머니가 “와이~”하고 대답하던 뒤꼍에서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여기저기 깨진 장독만 지켜보았다. 철융신을 뒤꼍각시라고도 부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가마솥 놓인 자리에 할머니 모습을 언뜻 겹쳐보았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누웠다. 그렇게 이 주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종종 할머니 생각이 난다. 가시기 며칠 전에 할머니가 평소보다 더 아프시다는 얘기를 듣고도 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가시던 날에는 아버지가 편찮으시냐 묻는 말에도,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꽉 다물고 계셨다고 했다. 여기까지 토해내고 나면, 생각의 잔고가 조금 가벼워진다. 하지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생각이 불쑥 찾아올 것 또한 안다. 그러니 착잡함을 한 번은 정리해두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끄적였다. 이 글은 그래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