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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2.10.25)

밤을 새고 집에 돌아가 씻으려는 길에, 문득 허기지다는 생각을 하여 잘 가지 않던 식당에 간다. 아침을 맞은 이들과 밤을 지샌 이들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아서 밥을 먹는다. 음산한 기분마저 드는 우울한 표정들에 각자 가진 피곤은 다르겠으나, 삶의 피로는 엇비슷한가 싶다. 내 몫의 한 상을 받아들어보니, 콩나물국에 김치에 버섯볶음과 식은 전이 기다린다. 따뜻한 콩나물국에 잠시 기분이 풀린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다들 밥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쓸쓸허다. 멀국에 쓸쓸함을 말아 얼른 훌훌 넘기고 집에 간다. 눕지 못할 침대를 곁눈질하다가 몸을 씻고 담배를 챙긴다. 덜 마른 머리 끝에 바람이 차다. 마음이 다시 저린다.


현대인은 삶에 무언가 사라졌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감각하기가 어렵다. 현대인의 삶은 언제나 공해인지 풍경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해서 그렇다. 공교롭게도 현대인인 나 역시 무언가 사라졌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감각하지 못한다. 다만, 돌아보니 무엇인가 빠져나가지도 않았고 무엇인가 더해진 것도 없는 채로 그냥 산다. 그 덕에 무엇인가 사라졌음을 더듬을 수는 있다.


할 일이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도 계속 줄지어 있다. 나는 자고 일어나도 자고 일어나도 잘 수가 없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덜컹거리는 마음이 신경쓰여 잘 수가 없다. 깨어있는 이 시간들이 오히려 공허한 꿈이 아닐까? 깨지 않을 꿈이라도 꿀 수 있다면 계속 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샌가 깨버릴 것이다. 꿈이란 게 원래 그렇다. 오줌이 마려웠든, 배가 고팠든, 하다못해 등이 아파서였든, 결국 깨버리고 만다.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는 거짓말 하지 않았다. 그는 죽으러 비셔스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비셔스를 만나러 갔다. 그래,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갑자기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특별히 어떤 이유 때문이었던건 아니지만 어쩜 망설임이 파도치는 바다 위 열병에 걸린 듯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당신께 펜을 들고 맙니다.“ 이 짧은 구절에 뭐라도 쓰지 않고는 마음을 풀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는 이유가 전부 담겨 있다. 이 글도 그래서 적었다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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