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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3.06.06)

광화문에서

혼자 에무시네마에 가서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왔다. 황금종려상이 잘 만든 영화의 보증 수표 같은 것은 아니겠으나, 꽤나 기대 이하였다. 분명 깔깔거리기도 했고 몰입해서 보긴 했지만, 영 어정쩡한 뒷맛이 남았다. 이를테면, 술 취한 선장의 방에서 울려 퍼지는 국제가와 그에 맞춰 슬라이드에 뛰어내리는 선원들.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부족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잡하고 정제되지 않은 계급 서사에 대충대충 코미디를 끼워 넣는 식. 나는 영화가 좀 울퉁불퉁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영화의 행로가 분명할 적에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 표류하는 화면들 사이에서 뭐가 남았나 생각하며 담배를 태웠는데, 영 모르겠다. 좋은 풍자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


담배를 마저 태우고 돈까스 백반을 먹으러 갔다. 에무시네마가 있는 골목에서 광화문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김권태 돈까스 백반이라는 집이 하나 있다. 나는 이 식당을 좋아한다. 물론 딱 한 번 밖에 가본 적이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 언젠가 다시 가겠다고 마음먹은 집이다. 이런저런 반찬들과 된장찌개, 돈까스가 나온다. 된장찌개가 정말 맛있었던 것 같고 소스에 두부 들어간 덜 자극적인 돈까스도 좋았던 것 같다. 물론 그 가격은 무척이나 사악하지만, 이 근방에선 뭘 먹어도 다 비싸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발걸음 가볍게 백반집으로 향했다. 소주도 한 잔 할까 싶었다. 물론 그것은 2인부터 식사가 가능하다는 걸 알기 전까지였고, 나는 짜증을 내며 광화문국밥으로 향했다.


비록 짜증을 내긴 했지만 광화문국밥은 절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곳이 아니다. 아마 광화문국밥을 김권태 돈까스 백반의 대체 식당 취급한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평양냉면과 국밥 중에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걸었다. 물론 집중이 쉽지는 않았다. 거리에는 자유마을이니 대구 78사단이니 하는 깃발을 들고 있는 노인네들이 잔뜩 깔려있었다. 찬송가와 군가를 반쯤 섞은 노래가 앰프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고, 광주가 어쩌고 하는 팻말들을 보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코로나도 무심하시지, 나는 이 노인네들이 얼른 빨리 다 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허, 나쁜 생각. 하지만 나 역시 서로를 증오하는 것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이 도시의 애송이인걸. 순면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다면 냉면 먹고 머리나 식히자.


증오와 회개를 반복하며 도착한 광화문국밥은 브레이크타임이었고, 뭔 놈의 국밥집에 브레이크타임이 있냐 싶다가도 미쉐린 빕구르망 받은 국밥집이니 그러려니 했다. 허탈해서 더 허기졌다. 그냥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그 인파를 뚫고 증오와 회개를 반복하다가, 101번 버스를 타러 종로 쪽으로 걸었다. 대구 78사단 깃발아래 모인 자유마을 어르신들은 동아일보 사옥 앞쪽에 모여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뭐라 뭐라 이야기했다. 이제 아마도 집회는 일종의 유희가 된 모양이다. 지방에서 모여든 어르신들이 보람찬 여생을 보내는 어떤 배출구인 것 같았다. 동시에 설치된 무대와 앰프, 심지어는 이동식 화장실까지. 이 분들을 서울로 실어 나르는 버스들은 어떠한가? 알뜰폰이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통신사 사업도 있는 것 같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저자는 어디선가 무슨 애국 어쩌고 유튜브를 하겠지. 피타입이 대극장 돌계단에 앉아 바라본 건 제일 센 나라 공관이었겠지만, 나는 여기서 제일 불쌍한 세대의 초상을 본다.


오는 길에 주말에 다시 영화를 보러 나오려고 ‘녹색광선’을 예매했다. 자주 가는 영화관이라고 해야, 씨네큐브와 에무시네마 그 둘 뿐이다. 둘 다 광화문에 있다. 내가 영화를 보러 다닐 날들이야 해야, 휴일뿐이다. 언제나 집회가 열리는 날들이다. 앞으로도 나의 문화생활은 다른 이들의 문화생활로 인해 꾸준히 저항받겠지. 조금 더 세상이 단순하고 간단했던, 아니 그런 줄로 믿었던 몇 년 전을 떠올렸다. 새벽 광화문을 혼자 걷다가 세월호 천막에서 믹스 커피를 한 잔 얻어먹고 울컥거리는 마음으로 조문을 했다. 세상이 그 사이에 변하긴 많이 변했다. 광화문은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은 것도 같은데, 나는 또 이렇게 뒤쳐진 채로 구차하게 산다. 그래, 나도 좋은 인간은 못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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