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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3.05.14)

이별에 대처하는 해로운 습관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신논현역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햇볕 드는 창가에 앉았는데, 문득 당신 생각을 했다. 비가 내리던 작년 여름에 당신의 문자를 받고 통화를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오늘 결혼한 친구와 신논현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 당신의 울음을 들었다. 덮쳐오는 당신의 울음 앞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당신의 긴 문자가 결국 ‘나도 힘들었어.’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당신의 안위를 물었다. 그날도 내 마음은 또 조각이 났다. 한 번만 내 마음 돌아봐주면 안 될까? 끝내 그 말을 못 했다.


그날은 빗길에 넘어져 무릎에 피가 철철 흐른 채로 집에 가야 했지만 오늘은 햇볕 드는 창가에 앉아 강을 건너며 눈을 붙였다. 발가락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구두를 잠시 잊었고,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푸르고 바람을 들여보냈다. 언뜻 바라본 창 밖 풍경이 동대문이었나, 한 번 정신을 차렸던 것도 같다. 근데 나는 한 번 잠에 들면 좀처럼 깨지를 못해서, 결국 또 졸고 말았다. 야속한 버스가 집 앞을 지나쳐 세 정거장쯤 더 나아갔다. 부랴부랴 차에서 내렸더니 익숙한 풍경에 가슴이 시큰했다. 왜 하필 이 정류장일까 생각하다가, 한 번 당신 살던 집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으로 접어드니, 가끔 당신 줄 빵을 사던 빵집 건물이 아예 없어졌다. 당신은 빵에 진지한 맛이 나지 않는 밀가루맛 나는 빵이 좋다고 했다. 돌아보면 나는 그 말에 적극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런가 싶지만,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름대로 빵을 골랐는데, 당신이 딱히 반기지는 않았던 것에도 큰 불만은 없다. 다행히 다른 가게들은 거의 그대로인 듯했다. 음료나 간식을 사러 가던 편의점도 그랬다. 바나나 우유를 고르려다 당신이 당 들어간 음료를 못 사게 했던 기억이 나서, 차 음료를 하나 샀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당신 집 앞에 서서 담배를 태웠다. 앞 집 현관 앞에 놓인 재떨이조차 그대로였다. 당신 살던 집의 유리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대충 머리를 묶고 안경을 쓴 당신이 슬리퍼 차림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이 집에 몇 번이나 왔을까. 하루는 자다가 당신이 피가 난다는 문자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왔던 기억이 난다. 수박을 먹으려다 칼에 베였다고 했다. 이제는 괜찮다는 당신을 안으며, 금방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공부하는 당신 뒤에 누워 영화를 보던 기억, 쭈그려 앉아 따뜻한 물에 라이스 페이퍼를 데쳐 월남쌈을 만들던 기억, 당신 품에 안겨 울던 기억, 웃던 기억. 지금, 목이 메는 것은 생일날 당신이 만들어준 스테이크가 너무 질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담배를 마저 태우고, 골목 끝에 서서 “갈게.”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 별 것 아닌 나날들이 하나하나 전부 데이트였고 사랑의 자욱이 되리란 걸 그 시절엔 잘 몰랐다.


나는 잘못 내린 정거장으로 다시 돌아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혼자 울었다. 노점상이라도 펼친 것처럼, 당신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전부 끌어다 길거리에 늘어놓았다. 당신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순간들, 그래서 마음이 조각난 순간들을 한 움큼 뽑아다가, 햇볕 좋은 곳에 말려두었다. 그걸 다친 마음으로 돌돌 말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면, 오늘도 가슴 안에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한 모금 더 쌓였다. 이건 이별에 대처하는 해로운 습관, 그것도 아주 해로운 습관. 근데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또 못난 손가락으로 지난 사랑을 잡아 피운다. 매캐한 연기 끝에 사라지는 지난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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