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의 꿈
여행의 주요 목적은 만취와 주정이었고 가장 먼저 사케바를 찾아 헤맸다. 몇 번 검색 끝에 내가 저장해 둔 곳은 ‘와슈 도코로 사케바’라는 이름의 작은 사케바였는데,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바텐더가 유쾌하다는 평이 많았다. 스스키노 밤거리를 두둥실 떠돌아다니던 삿포로 첫날 밤 일단 사케바로 향했다. 문 앞에는 자그마한 포스트잇과 일본인 커플이 서있었다. 여기 들어가려고 웨이팅 하는 거냐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이어서 일본어 포스트잇 앞에 막막해했던 내게 스윗 일본남은 사장이 자리를 비웠다는 내용이라고 알려주었다. “오우 아리가또 아리가또” 대답하면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오네가이시마스를 붙이지 않아 건방진 조센징으로 보였을까 걱정했다.
비에이 투어를 다녀온 후 수프카레를 흡입하고 다시 한번 사케바로 향했다. 다행히 포스트잇이 없었고 문을 활짝 열자, 2000년대 후반 감성 박명수 같은 모습을 한 사장님이 “위 아 풀 풀!!” 이야기했다. 들어가 보니 10명 간신히 앉을까 싶은 바에 8명이 이미 옹기종기 들어차 있었다. 나는 제갈량을 찾아가는 유비의 심정을 십분 공감했는데, 유비도 두 번 못 보고 나서는 ‘이 새끼 어떻게든 만나는 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렇게 삼고초려, 아니 삼고사케바 끝에 우리는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코코와 키츠엔데스까?” 하고 담배를 꺼내자, 박명수, 아니 바텐더가 재떨이를 가져다주며 “한국인들 담배 좋아하네~ 스트레스가 많은가봐~” 하고 이야기했다.
카라구치한 술을 좋아하는 호경을 위해 여러 사케를 차례로 마셨다. 좀 취하다 보니 다른 일본인 손님들과도 편하게 얘기를 했는데, 내 어설픈 일본어와 영어가 섞인 대화를 다른 손님들은 잘도 받아주었다. 사장님은 제법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막잔”, “알잘딱깔센” 같은 용어를 정확히 구사했다. 애니메이션부터 j-pop, 스포츠와 일본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했다. 애니메이션 얘기를 하면서 한국에서도 불러본 적 없는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불러보았다. 요아소비와 X-japan의 이야기도 좀 했던 것 같고, 스포츠 이야기를 할 때면 신유빈과 팀 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엔도 와타루로 받아치고 미시마 유키오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이야기를 헸다. 끝에서는 “혼또니 니혼 오타쿠”라며 일본인에게 손가락질받았다.
가게에는 다나카라는 이름의 5-60대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형님과도 무척 즐겁게 대화를 했다. 내가 아직 도쿄에 가본 적이 없으나 치바와 이나게를 가고 싶다 하자, 아니 대체 어떻게 이나게를 아는 것이냐며 근처에 사케가 아주 유명하다고 추천을 해줬다. 다나카 형님에게 우리는 한국 코미디언 중 다나카라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와스레나이’를 불러줬다. 형님은 껄껄 웃으시더니 자기 지역 소주라며 붉은색 밤소주를 한 잔씩 사줬다. 맛은 기억나지 않았는데 감사한 마음에 먼저 들어가는 다나카 형님과 포옹을 했다. 만취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쓰러지듯 잠든 밤에 별 꿈은 꾸지 않았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자기 전에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꿈결 같은 사케바의 즐거운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