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다 사케오셨네
오늘 집에 사케 배송이 왔다고 하여 쓰던 논문도 접어두고 잠깐 집에 다녀왔다. 최근 괜찮은 가격에 뛰어난 사케를 알게 되어 같은 것으로 4병을 주문했다. 해당 양조장은 도쿄 옆 치바현에 위치한 140년 넘은 곳인데, 최근 나리타 공항 항공사의 정비사 출신이 20대 나이에 양조 총책임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내가 시킨 것은 무로카나마겐슈라고 하여 여과하지 않고 물도 섞지 않고 열처리도 하지 않은 술 본연의 맛을 보여준다. 차게 해서 마시면 탄산감과 화사한 과실 향이 압도적인데, 가격도 배송비 포함 5만원 안쪽이니 여러 병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간만에 취향이란 것이 생겼으니 한 발짝 더 생활인이 되었다. 그간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딱히 좋아하는 술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다.
어쨌거나 전부 냉장고에 보관하고 집을 나서는데 꽃이 눈에 들어왔다. 전봇대와 보도블록의 부서진 틈 사이로, 회색 도시의 틈 사이로, 대학원생과 한량의 틈 사이로, 리젝과 리비전의 틈 사이로 노란 꽃이 쭈뼛거리고 있었다. 몇 송이는 이미 진 것도 같은데, 그동안 한 번도 눈 마주치지 못한 것은 대학원생 출퇴근이 급한 탓이다. 슬리퍼 찍찍 끌고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내 처참한 사진 이해와 미감은 지금 이 사진이 최선이었다. 그니까 저것보다는 훨씬 예뻤다는 말이다. 어디 꽃밭에 한데 모여 피는 꽃들보다 이런 꽃이 더 예쁘다. 도시의 틈에서 피어난 꽃은 강인함과 고독함을…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이런 회색 무기력한 배경에 피어난 꽃이라 예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러고 보면 나는 어쩌면 이 꽃도 꽃이지만 이 꽃의 배경을 좋아하는 것인가? 나는 방금 전까지도 도시가 무기력하네 어쩌네 했지만 이런 골목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단 말이다. 꽃잎의 배경 되시는 도시에 대고,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이야기하며 고개 숙이는 상상을 했다. 대번에 따귀가 날아오고, ”이런 돼먹지 못한 속물 같은 놈이 어딜…“ 소리를 들었다. 그러게 진짜 속물이 따로 없지. 누구보다 도시의 속물들을 역겨워하면서도 서울 밖에서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속물 중의 속물, 그것이 나다. 불법개조 건축물을 거쳐 반지하, 이제는 볕은 들지 않지만 1층까지 올라왔다. 다음 이사할 때는 햇볕 드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 거기에 건조대를 두어 빨래를 널어놓고, 냉장고에서 사케를 꺼내 예쁜 잔에 가득 따라 마셔야지.
이런 생각울 하며 아직도 연구실에 앉아있으니, 밤이 늦었는데도 술 생각이 간절하다. 내일은 두부와 돼지고기를 조려서 사케를 한 잔 할 것이다. 그러려거든 이 밤에 얼른 논문을 끝장내야만 한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이제야 다 추렸고, 이제는 또 짜증 나는 그래프와 씨름해야 한다. 그래도 내일 마실 사케를 생각하며 밤을 새운다. 그러다 담배를 피러 나와서 잠깐 이 글을 쓰고 있다. 문득 이 근황 시리즈를 언제부터 썼는지 찾아봤는데, 2015년 12월 9일 처음 쓰기 시작했다. 전역한 지 한 달된 예비역이 민방위 통지서를 받을 만큼 썼다. 벌써 9년 차가 되었는데 못해도 한 달에 한 편은 쓴 것 같으니 이런 저런 잡글 다 합치면 100편 정도는 썼으려나. 그 숱한 글들도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올라가서 마무리해야 할 논문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위로 뻗는 담배연기 틈 사이로 이름 긴 사케와 이름 모를 꽃이 동시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