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여름만 되면 이 소리 하는 게 지겹지만, 나는 여름이 정말 싫다. 여름의 좋은 것들에 대한 리스트는 다 빈칸, 그 첫줄에 적힐 네 글자는 ‘멜론 먹기’ 말고 없다. 더우면 더워서 화가 나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화가 난다. 잠도 잘 자지 못한다. 지난 몇년간 내 불면의 밤은 여름에 피어나 겨울에 지기를 반복했다. 뚱뚱한 몸을 이끌고 다니는 것도 짜증나는데, 여기저기 아픈 곳도 많아진다. 옷 입는 것도 화가 난다.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물론 최대한 피하는 편이지만-라면 더욱 화가 난다.
자취방 구석을 둘러보면 문제가 더욱 심해진다. 특히 가장 심각한 것은 에어컨인데, 실외기와 연결된 관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녀석은 정확히 같은 증상으로 2년 전에 수리한 녀석인데, 다시 지병이 도진 모양이다. 더군다나 요즘 이 친구가 난데없이 제빙을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비 오는 날이면 문자 그대로 에어컨이 얼음을 뱉기 시작한다. 에어컨은 정확히 내 침대 위에 달려있는데, 자다가 삐끼삐끼 소리와 함께 이불 위로 얼음이 떨어진다. 묘하게 그 소리가 기아 타이거즈 삐끼삐끼송과 닮아 있어서 새벽에 자다 깨서 이주은 치어리더를 팔로우 했다. 아니 아니 이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아무튼 에어컨은 삐끼삐끼 챌린지를 하고 나는 난데없이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고 있으니, 실로 도전적인 공간이다.
여름에 대한 혐오는 오늘 아침 한 줄 또 추가되었는데, 아침에 스퀏을 하다가 순간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호흡이 힘들었다. 아침에 잠을 얼마 못자고 운동을 가서 블랙 커피를 마시며 운동했는데 그게 여름과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 이것도 여름 탓이다. 실수로 현미쌀 2kg 두 개 산 것도 여름 탓이고, 나이 서른 넘어 동생이랑 말싸움을 해도 여름 탓이다. 비유하자면 당원 아저씨들 술 마시는 것처럼 여름을 보내는 것인데, 아무쪼록 아저씨들은 윤석열 욕을 하고 나는 여름 욕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래 이 비유가 망한 것도 여름 탓이다.
오늘은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코드를 대충 마무리하고 퇴근을 했다. 남청색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내내 노랑 형광등 불빛 아래 있어서 그런가, 남청색 여름 하늘이 어쩐지 장엄하다. 다른 계절이었다면 그냥 구리구리한 하늘 모습이 여름 덕분에 괜찮아 보인다. 저 먹구름 뒤에는 푸른 하늘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라고 이십대 초반에는 상상했다. 잿빛 하늘 먹구름 그게 더 아름다운지도? 같은 소리를 하며 이십대 후반을 보냈다. 저 먹구름 뒤에 남청색 하늘 없기만 해봐라, 하고 이를 가는 삼십대 그것이 나다. 제빙하는 벽걸이 에어컨을 떠나 스탠드형 에어컨을 타고 가자. 먹구름 뒤의 남청색 하늘에서 비타민과 밀크씨슬을 챙겨먹고, 고지혈증과 당뇨에 대한 팟캐스트를 들으며 조깅을 하자. 요즘 이렇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