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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4.09.08)

오늘 기후정의행진에 갔다가 이랑을 봤다. 아니지, 본 무대는 멀리 있었고 이랑의 노래를 설치된 화면과 스피커로 들었다. 내게 이랑은 신의 놀이 앨범에 멈춰있어서 그런지 어딘가 뻘쭘했다. 전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요즘 들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친구마냥 관계의 온도차에서 오는 어색함이다. 사실 얼마 전에 이랑의 독립 영화를 하나 본 적이 있는데, 에무시네마 가면 맨날 광고대신 틀어주는 공익 광고 영상 같은 것이다. 그걸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저런 감수성이 싫다고 생각했다. 선한 사람들의 진솔한 대화 속에 말할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 태어난다는 믿음, 그 천진함이 싫다. 동시에 나는 평생 그런 감수성을 갈망해 왔다. 술만 처먹으면 자꾸 왠지 모를 인류애가 가득 차올라 절로 친하지 않은 이들의 안부를 묻고 애정을 투사하지 않나. 몹쓸 인간이다, 정말로. 그래서 오늘은 동현이랑 술을 마셨지만, 방에 누워 조용히 이랑 노래를 듣는 중이다. 가족을 찾아서를 나눠 듣던 시절이 떠올랐다. 내 안에 있는 내 노랠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오늘 기후정의행진은 당 아저씨들이랑 갔다. 나는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아저씨들과 어울려서 술 먹고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면 가오 잡는 애새끼들 사이에서 서로 띄워주는 말 얹어대는 것보다야 늙은 지담 사장님 놀리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 그리고 별종들 모이기 쉬운 이 판에서 나이 5-60 먹은 아저씨들이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감격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 동현이랑도 얘기했지만, 이 분들이 당을 지켜온 세월은 그 자체로 훈장이다. 동현이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물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딱히 별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것이다.


전역한 지 이제 나흘쯤 된 김동현은 오늘 내가 산 1+1 바지를 하나 빌려 입고 성북천 러닝을 같이 했다. 동현의 몇 안 되는 재능에 러닝을 추가해야 할 것 같은데, 킬로미터에 4분 50초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이 녀석의 러닝은 어딘가 이랑스럽다. 자기만의 속도를 갖고 뛰면서 함께 뛰는 사람 돌아보는 걸 잊지 않는다. 세상 모든 좌파들이 로스쿨을 가는 시대에 여전히 사회과학을 하겠다고 전역하자마자 박사 입시를 하고 있다. 아마 당 아저씨들이 지역을 지켜왔던 시간만큼 이 녀석에게 술을 사줘야 하겠지. 이젠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우스운 꼴을 자주 본다. 물론 누군가가 돈을 버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평가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은 나다. 그런데 어떤 친구들은 끽해야 삼십 년 살아 놓고 세상사 통달한 듯 군다. 김문수처럼 굴어야만 변절인가? 지나온 자리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 어른스러움은 변절이 아닌가? 운동이고 학생회고 좌파고 뭐 어쩌고 그런 것들, 젊은 날의 무엇으로 너무 쉽게 정리한다. 그런데 너네 왜 ‘그때’가 진심 아니었던 척하냐? 지난 인생의 어떤 부분들 공백으로 만들어두고 당장 오늘에 떳떳하냐?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니냐? 안녕들하시냐? 젊은 친구 사회에 온 것을 환영하네에에에, 과거는 잊고 미래만 신경 쓰면 되는 곳이라네에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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