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운 것 중에 날 먹고살게 해주는 것은 옴의 법칙이지만, 가끔 가장 귀중한 가르침은 도시에서 별을 보는 법이 아닐까 한다. 까만 시골 하늘을 수놓는 별이 좋다지만, 그조차도 떠날 엄두 못 내는 도시인에겐 사치스럽다. 어둑한 골목길 가로등에서 떨어져 올려다보는 하늘에서 보는 별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오늘 밤 집 앞 골목에 유난히 별이 밝다. 피곤해도 기분이 뭉글뭉글하다. 수비드 된 돼지고기마냥 잔뜩 연해진 기분이다.
밤하늘에 걸린 달과 별이 사람을 연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연해진 인간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인지. 나는 아주 굳센 강철의 엔지니어 지망생이므로, 두 가설 중 전자를 따르겠다. 밤하늘은 그저 예쁘다는 것 말고도 다양한 감상을 가져오는데, 가장 앞서는 것은 경외감이다. 무슨 밤하늘 전문가처럼 지껄였지만 나는 천체 운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아는 별자리도 손에 꼽는다. 하지만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주는 경외감, 뒤따르는 작디작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 끝내 반짝이는 약간의 외로움과 공허가 언제고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술 한잔 마시지 않고 밤하늘을 보는데도 감상이 마구 솟는다. 씻고 나와 올려다보는 하늘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숨을 길게 내뱉으면 왠지 가슴속 심마가 탁기의 형태로 빠져나와 별빛 사이 스러질 것만 같다. 얼마 전에 루카 구아다니노의 챌린저스를 봐서 그런가, 욕망이라는 키워드가 문득 떠올랐다. 체제가 어떻게 그것을 단계적으로 배치시키고 나는 지금 얼마나 속물이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마가 곧 욕망이라 한다면, 나는 결국 마도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껏 추구하여 마의 극치에 다다르면 물극필반 만류귀종의 이치 속에 도를 얻을 수 있나?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이들은 어떻게 도를 찾는가? 행이 곧 술이 되고 술이 곧 법이 되고 법이 곧 도가 되는 것. 그게 이치라면 우리 모두 거꾸로 사는 것은 아닌가? 도에서 법만을 찾으며 법에서 술수를 부리고 술수가 언행으로 자리 잡는 게 요즘 사는 방식 아닌가? 이 생각을 왜 하고 있었지. 처음엔 조쉬 오코너와 키스하는 젠데이아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시한부 연초가 생각을 멈춰주었다. 오른손엔 꽁초만 남았고, 골목길엔 다시 밤하늘만 남았다. 동쪽 하늘에 오리온자리 삼태성이 보였는데 이제 여름이 끝나간다는 신호일까. 이건 내 나름의 노하우인데, 안암에서는 밤하늘을 알아보기가 제법 쉽다. 참살이길이 정북과 정남을 이어주는 도로라고 생각하면 어디서든 방위를 찾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이번 여름도. 양손을 경례하듯 모아서 눈밑에 가져다 대고 밤하늘을 보면 이런저런 다른 불빛들 방해 없이 도시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 늦게까지 모니터를 보다 침침한 눈에 손톱 모양 달이 둘로 나뉘어 보인다. 이 방법을 알려준 과학 선생님 이름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덩치가 큰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구체적으로 떠올리려니 강홍석 롤라가 떠올라서 그만두었다. 불초제자를 용서하세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