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본
청소를 다 하니 4시쯤 되었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남은 화이트 와인을 마저 마셨다. 변요한 첫인상이 별로라니. 고애신은 오지콤인가? 같은 생각을 하는데 허기지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오늘 밥을 한 끼만 먹은 탓이다. 사실 퇴근 직후부터 허기지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더 이상 이 근처에는 12시에 술 먹자하면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다. 웅렬이 있기야 하지만 그는 이제 바른 생활 사나이다. 그 외에는 생각나는 이름들이 별로 없다. 왜 허기진데 술 얘기를 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는데, 작금의 금주 금연 트렌드에 대해선 좀 불만이 많다. 인생 한 번 왔다 가는 것인데, 뭐 그리 오랜 단골이 되려 애를 쓰는가? 어차피 인생은 오래 산다고 계란 후라이 한 장 부쳐주지 않는다. 술 먹고 담배 피고 즐겁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술은 도구가 아닌 목적이다. 술 맛도 담배 맛도 모르는 그들을 나는 불쌍히 여긴다.
아무튼 소주 한 잔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길을 나섰다. 내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최대한 괜찮은 식당을 생각해보니 어머니 대성집이다. 어두운 용두시장을 담배를 피며 걸었다. 언젠가는 시끌벅쩍했던 것도 같은데, 모두 죽어버렸나. 글쎄 알게 뭐람. 도착한 어머니 대성집에 어머니는 당연히 없다. 그래도 어머님 또래의 종업원들이 계셔서 원래 일하던 분들일까 아니면 컨셉일까 잠깐 생각했다. 1층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먼저 와있는 무리가 영 거슬린다. 얘기를 좀 들어봤는데 명문대 자의식 가득한 좆도 일못하는 요즘 애새끼들 전형이다. 끽해야 서른도 되지 않은 남녀 동수 여섯인데, 말끝마다 “씨발년”을 거듭하는 하늘색 니트 안경잽이가 오피니언 리더로 보였다. 딱히 친해보이지도 않는다. 문득 존나게 짜증이 난다. 동시에 연민이 든다. 욕설을 벗삼는 친우들은 알아두도록. 욕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욕설인가가 중요하다.
육회비빔밥에 소주를 하나 시켰다. 전에 보니 비빔밥에 해장국 조그만 것을 하나 주길래 그렇게 했다. 근데 어대집이 원래 육회비빔밥을 팔았던가? 육회는 있었던 것 같은데 꼬치산적은 어디로 갔지? 정확히 두배쯤 오른 메뉴판을 보면서 서성거렸으나 더 시킬 수 있는 메뉴는 없었다. 역시 어대집은 6명쯤 와야 맞다. 이것저것 시켜놓고 먹는 맛이다. 혼자 술을 마시면 한 병이 한계다. 처음처럼 하나 시켜놓고 신영복의 글을 속으로 비웃었다. 대체 그 책이 왜 좋은지 나는 모르겠다. 군대에서 읽었어도 그 책만큼 노예스러운 책이 없다. 건너편 테이블은 다시 씨발년을 운운하고 에겐남을 운운했다. 생각을 그만두고 비빔밥을 마저 먹었다.
오늘 수정본을 제출했는데, 월요일에 가제본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수정 사항 많다면 아무래도 내일 또 논문을 붙잡고 있어야 할 테지. 심사는 또 어떻게 치뤄내야 하나. 이 논문의 약점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낙엽같은 문장들이 추풍같은 질문들에 휩쓸려 나간다. 그 가을바람은 스스로가 던졌음에도.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질거라고 어제도 오늘도 새벽 하늘에 대고 타일렀다. 그런데 내 살아온 나날들 속 시간 지나서 나빠진 것들 리스트를 작성하다보면, 영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왜 그러고 사냐’고 물었던 인연들은 이제 어떻게 사는지? 개좆같은 놈들. 볼 수 없는 것은 이제 없는 거니까, 원래 없었던 것 같네 그 거리가. 취기가 온 몸 구석구석 퍼진 것 같으니 그만 두자. 씨발년과 개좆같은 놈은 얼마나 서로 떨어져 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