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25.11.23)
<대부>가 미국의 건국 신화를 이야기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대부>는 기본적으로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국가에서 또다른 이민자 집단이 사적 폭력을 통해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야기의 중심인 ‘콜레오네 패밀리’는 가족이자 조직이자 기업으로 보이며, 공권력과 일정 부분 긴장을 유지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조직의 수괴를 ‘대부’라는 종교적인 호칭으로 부르며, 종교적 관계를 세속에서도 관철하는 또 하나의 제국처럼 보인다. 1부는 그 제국의 위기와 승계과정을 다루고, 2부는 제국의 시작과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기존 가치를 포기하며 성장하는 제국을 동시에 그린다.
다만 이러한 가족공동체의 형성과 해체, 그리고 가족과 국가의 관계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정성시>는 <대부>에 대한 반문이라 할 만하다.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그렇다. 혼란스러운 시기 동아시아의 가족 서사는 필연적으로 비극을 부른다. 국가와 긴장하기 보다는 국가의 폭력 앞에 스러져가는 린가문의 사람들이 그렇다. 첫째는 비슷한 폭력 조직과의 다툼 끝에 죽는다. 군의관으로 참전한 둘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반쯤 미쳐 돌아온 셋째는 끝내 폐인이 되어버린다. 청각 장애를 지녔지만 누구보다 순박한 넷째마저 국민당 정부에게 끌려가며 영화가 끝난다. 심지어 이들은 이민자조차 아니며, 이 섬으로 이주한 것은 국민당 정권임에도 그렇다. 엔딩에서는 끝내 풍비박산이 난 집에서 이제 힘없는 할아버지와 폐인이 된 아들, 아버지를 잃은 손자가 모여 밥을 씹어 넘긴다. 대를 걸친 비정이 이 성시를 둘러싼다.
결혼식으로 시작하여 세례식으로 끝나는 <대부 1>처럼 할아버지의 생일로 시작하는 <비정성시> 역시 제사와 결혼식을 거치며 진행된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 그리고 둘>을 같이 엮어서 생각해보라. 제사와 장례식, 누군가는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삶의 의미를 씹어 넘긴다. 허우샤오셴과 에드워드양의 작품에는 격변하는 시대 속 대만 공동체가 살아내야 하는 근원적 슬픔이 있다. <비정성시>의 화면들은 지속적으로 지우펀을 그리며, 동시에 롱 쇼트로 그 위 간신히 움직이는 인물들을 그린다. 동양화 같은 이 화면들 속에서 주인공은 린가문의 남자들이 아닌 지우펀이라는 도시가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린가문의 남자들이 겪은 비극은 지우펀이, 곧 대만이 겪은 비극이 된다. 영화의 주요한 소재인 2.28 사건과 그로 인한 계엄령 선포 이후 국민당 정부에게 학살당한 민간인은 최소 3만명이라 알려져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계엄령이 끝난지 불과 2년만에 이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에 전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전히 당시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진다.
그래서 <대부>가 황량한 알파치노의 마음속으로(1에서는 케이의 눈빛으로, 2에서는 케이마저 떠난 알파치노를 담으며) 카메라를 비췄던 것과 달리 <비정성시>는 슬픔을 곱씹는 삼대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대부>의 세계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고 승리했다는 것이니,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남자의 비참한 고독이 짙을 뿐이다. 다만 <비정성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슬픔을 머금고 하루를 견뎌내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남은 자들의 비탄과 애도가 짙을 뿐이다. “너희는 존엄을 지키며 살거라, 이 아비는 죄가 없다.” 원칭이 전달하는 유서는 무덤덤하나, 그 행간만큼은 절절하다. 살아남아 기억하려는 이들에게, 고독이나 황량함에 대한 감상 따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비극적 역사를 기반으로 한 비장함이 대만의 뉴웨이브가 아메리카 뉴웨이브에 보내는 반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문에 마땅한 답을 하기 점점 더 어려운 시대가 되어간다고도, 생각한다. 종류 다른 슬픔이 서울을, 한국을, 대만을, 아니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여전히 비정성시다. 어떻게 살아남아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여전히 반문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