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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Apr 29. 2020

단독자가 되고픈 열망

《인간의 굴레에서》(1915) - 서머싯 몸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대개 뜻대로 되는 일을 압도한다. 어렸을 때 꾸었던 숱한 꿈들의 시간이 헛되게도, 그 꿈대로 살아가는 이는 극히 드물(것 이)다. 누구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지만 그 순간은 달콤한 커피 한 모금처럼 찰나 같아서 한참을 견뎌내야 또다른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순간의 만족과 지루한 불만족의 시간들, 어찌하겠는가. 그런 운명 앞에 말이다.


서머싯 몸의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민음사, 1998)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제목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4부의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굴레' 혹은 '예속', '속박'이라고 번역되곤 하는데,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이르는 자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서머싯 몸은 원래 책의 제목을 성서의 구절에서 차용하여 '재 속의 아름다움(Beauty From Ashes)'이라고 지으려 했다고 한다. 비록 다른 제목을 택했지만 두 제목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바로 고난이라는 인간의 숙명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필립이 어머니를 여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먼저 아버지도 떠나보내 고아가 되어버린 필립은 사제인 백부와 백모 슬하에서 자라난다. 필립은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다리가 짧은 절름발이여서 학교에서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자녀가 없어 어린 아이를 대하는데 서툴렀던 백부와 백모는 필립을 위로해주지 못한다. 학교를 졸업할 즈음, 필립은 불행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다가 공인회계사 견습사원이 되어보기도 하고, 마음에 품었던 예술의 꿈을 이루고자 파리에 가서 그림을 배워보기도 한다. 하지만 적성과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돌아와선 죽은 아버지를 따라 의학도의 길을 걷는다. 이곳저곳 전전하는 과정이 순탄치 만은 않다. 여러 관계 가운데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고, 돈을 모조리 탕진한 후 극빈한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굴곡들을 통과하며 필립은 삶의 의미를 조금씩 깨우쳐간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필립의 낙관적이고 힘찬 발걸음이다. 괴롭힘 당하는 게 싫어 도망쳤던 독일에서 필립은 예술의 세계에 눈을 뜨고 삶을 개척해간다. 시도가 실패로 끝이 나도 필립은 주저앉지 않는다. 독일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런던으로 필립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실패는 젊음의 특권이라 했던가. 상처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필립을 성장시키는 발판이 된다. 아무 재료 없이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없듯, 실패 없이 삶을 완성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필립을 움직이게 했던 힘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단독자를 향한 열망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단 하나로서 존재하고 싶은 열망, 다른 누구도 아닌 유일한 자이고 싶은 열망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다. (...)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2권, 366~367쪽) 꿈이 좌절되고, 친구의 죽음과 실연을 비롯해 여러 일들을 겪으며 필립은 깨닫는다.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무늬를 만들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열망은 누군가에게 유일한 사람이고 싶은 에로스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적 호기심에 눈을 뜨게 되는 십대 때부터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필립은 여러 사랑을 만난다.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본능에 휘둘렸다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반대로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려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왜 사랑하고 상처 받는가. 사랑은 마치 원하지 않아도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와도 같다.


어쩌면 단독자를 향한 열망 자체도 '굴레'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듯이, 굴레가 있기에 자유와 행복이 있는 것이라면 굴레 따위 견뎌볼만 하지 아니한가. 필립이 만나고 가슴 설렜던 문학 작품과 그림들은 필립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슴 또한 설레게 하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그 아름다움은 '굴레'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멋진 무늬들이다.


필립의 이야기 마주하니 한철 진하게 꿈꾸고 방황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필립처럼 삶의 여러 가능성들을 펼쳐 두고 고민을 거듭하던 때가 있었다.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 해보기도 하였고, 쓴 맛과 단 맛 번갈아 맛보기도 하였다. 지금껏 걸어온 삶의 궤적을 모아본다면 어떤 무늬가 만들어질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열망이 지금도 쉬지 않고 때때로 내 안을 뜨겁게 달군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마음은 무엇인가. 단독자를 향한 열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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