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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Apr 30. 2020

아직 쓰지 않은 일기장

《휴전》(1960), 마리오 베네데띠


가까스로 취준에 성공해서 직장생활에 열심히 적응하며 지내던 신입사원 시절, 아침마다 타야했던 지하철은 지옥 같았다. 매일 똑같은 시각에 맞춰 일어나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환승역은 절정이었다. 폭이 수십미터나 되는 통로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일정한 속도의 걸음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오가며 만나는 직장인들의 얼굴은 다들 굳은 표정이거나 졸린 표정이었고, 그것도 아니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거나 작은 스마트폰에 머리를 빼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답답하고 삭막한 곳에 살고 있는 것인가. 믿기 싫었다.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럭저럭 적응해갔다. 출퇴근길엔 사람들이 가장 적게 다니는 시간대를 찾아보기도 하고, 가장 덜 붐비는 경로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직장생활은 차츰 익숙해졌다. 출퇴근길도 더 이상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다. 이제 곁을 스치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나보다. 불편하게 느꼈던 삭막함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쳇바퀴 속에 갇혀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2015, 창비)의 주인공 마르띤 산또메는 이 쳇바퀴 같은 일상을 탈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년의 회사원이다. "이제 퇴직까지 6개월 28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휴전》의 첫 대목은 산또메의 일기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일기 속에서 산또메는 담담하고 재치있는 어조로 참을 수 없는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적어간다.


담백한 문장들 사이사이로 산또메의 삶이 그려진다. 삶에 드리운 크나큰 불행의 그림자도 정체를 드러낸다. 산또메는 21년 전 상처한 후 5년의 결혼생활 가운데 얻은 3명의 자녀와 아등바등 살아왔다. 다른 사랑은 꿈꿔볼 새도 없었다. 아이들과 잘 지내보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그 오랜 시간 산또메는 신과 불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내색하진 않지만 자신을 거대한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신과는 화해할 마음이 없어보인다. 《휴전》은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휴전 같은 시간을 그려내는 소설이다.


직장인으로 몇 년 살아보니 출퇴근길 말고도 익숙해지는 일이 있다. 월급날과 휴일을 기다리는 일, 월요일이 지옥같이 느껴지는 일이다. 하루하루 고단할 때마다 주말을 기약하며 버티곤 한다. 그래도 종종 생기는 특별한 일들은 퍽퍽한 일상에 내리는 단비 같은 일이다. 도전해보고 싶은 일을 만난다든가,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만남이라든가,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모임이라든가. 이런 일들이 있어 일상이 그런대로 흘러간다. 지난한 삶이 있기에 이런 일들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불행과 행복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어떤 삶도 풀 수 없는 아이러니일게다. 모두가 산또메처럼 그 문제 앞에 용기 있게 신과 대결할 수도 없을게다. 그럼에도 붙잡을 만한 사실이 있다면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일은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 아닐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형벌이라던 철학자도 있었지만 삶이 없었다면 그런 말도 없었다. 오늘 남아있는 시간은 불행에게나 행복에게나 동등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일기장 속 빈 페이지도 마찬가지다. 그 여백을 채우는 건 우리의 손이고 삶이다.



Photo by Hannah Olin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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