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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Apr 28. 2020

'문학', 이 가슴 설레는 단어

 「상속」- 김성중 (2018 현대문학상 수상작)


문학계의 시계는 세속의 시계와는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박완서는 40세에, 김훈은 47세에 등단하여 작가들의 작가가 되었다. 황석영은 19세 때 등단하여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박경리가 토지를 완성한 것도 일흔을 넘긴 후의 일이었다. 문학 계간지에선 지금도 간간히 중년들의 등단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백지(白紙) 앞에서 모든 작가들은 같은 출발선 위에 서 있다. 누구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할 수 없다. 이 순백의 순진무구함.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밝히 드러날 것이다. 이 순진무구함은 모든 작가들이 느끼는 공포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찌 이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으랴.
 
김성중의 단편소설 「상속」은 문학, 이 설레는 두 글자짜리 단어가 명명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이십대 작가 지망생 진영은 문학 아카데미에서 나이 마흔 아홉의 중년 기주를 만난다. 진영과 기주가 만난 건 이십대 젊은 소설가가 처음으로 진행하는 소설 쓰기 강좌에서였고, 이 셋은 각자 얼마큼의 시간을 살아왔고 삶의 무게를 가졌든지 상관 않고 위로를 주고받는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찬란한 공동체의 순간들은 추억이 되고,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온다. 젊은 소설가, 그리고 중년의 기주는 10여년의 시차를 두고 죽어간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소멸을 기다리며 이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젊은 소설가는 기주에게 손때 묻은 오백권의 책을 남겼고, 이제 죽어가는 기주는 작가로 등단한 진영에게 그 책을 물려주려 한다. 이 책들엔 미처 책이 되지 못한 젊은 소설가의 아이디어와 기주의 마음이 머물러 있고, 꾹꾹 눌러 그은 밑줄과 메모엔 말로 전하지 못한 말과 숨결이 담겨있다. 이제 이 ‘상속’된 책들 안에서 문장과 단어 사이를 오가며 선생과 기주, 진영의 마음은 끝없이 공명할 것이다. 책들이 존재하는 한, 진영이 펜을 놓지 않는 한 공동체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오십을 한 해 앞둔 중년의 기주가 처음 문학 아카데미로 걸어 들어갈 때 느꼈을 두근거림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중년의 여성에게 나이가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젊은 소설가가 소설을 열심히 써보라고 권하는 순간, 그 말을 들은 기주가 얼굴이 벌게지는 순간이 좋다. 켜켜이 쌓인 수강생들의 부족한 습작들을 가리켜 ‘꿈의 더미’라고 짓눌러 쓸 줄 아는 작가의 마음이 좋았다. 나도 몰래 위로 받은 것만 같아 달리는 지하철에서 한동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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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 웹서핑을 하고 난 다음에야 학생들의 습작을 꺼낸다. 더미, 이것은 꿈의 더미들이다. 몇 페이지를 들추기도 전에 과녁이 정확지 않아 빗나간 화살들이 발밑에 수북하게 쌓인다. 그럼에도 빛나는 구석들은 하나씩 품고 있다. 명랑하게 반짝이거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대사가 나온다거나, 플롯 자체는 진부하지만 감각이 좋다거나…‥. 이런 식으로 조그마한 장점들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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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 씨는 이번 작품으로 완전히 이륙했어요. 내가 할 일은 활주로 끝에 서서 높이 나는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것뿐이에요. 열심히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나올 박기주 씨의 책에 첫 번째 독자가 되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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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에 채는 무수한 파편들, 사금파리의 연약한 미광, 빛은 거기에서도 나왔다. 일찍 죽은 천재가 쓰지 못한 다음 책, 세월을 통과하지 못한 세태소설, 잔업에 지친 회사원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야근’이라는 제목의 소설과 대학생 습작품 속 뜻밖에 좋은 두 문장, 요컨대 성공을 거두지 못한 모든 소설의 잔해가 거기 있었다. 모래보다 작고 반딧불보다 약한 빛의 입자가 대지 위에 빛무리를 이루었다. 그 빛을 반사하며 깨지지 않는 항아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나는 파편 하나를 주워 거기 적힌 단어를 읽었다. 그러나 빈집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처럼 쓸쓸하면서도 다정한 기분이 들었다.
‘에메랄드를 혀 밑에 넣으면 진실만 말하게 된대.’
보석 밀수꾼 이야기를 쓰던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보석을 삼키면 저 무거운 펜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이야기들이 다시 돌아와줄까.
종이를 찾기 위해 나는 꿈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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