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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May 04. 2020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자리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이기호

이기호의 단편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은 “87년 3월부터 기아자동차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치백 스타일의 자동차” 프라이드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야기는 화자의 삼촌에게 할머니가 프라이드를 사주면서 시작된다.


1980년대 서울에 상경한 화자의 삼촌은 말없고 숫기 없던 촌놈이었다. 그런 삼촌의 혼삿길이 걱정인 할머니가 차를 끌고 다니면 연애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사준 게 그 당시 최신 자동차인 프라이드였다. 하지만 삼촌은 하라는 연애는 하지 않고 그만 프라이드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집을 놔두고 프라이드에서 먹고 자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프라이드에서 살기 시작한 지 20여 년쯤 되던 날, 삼촌은 낡은 프라이드를 집 앞에 세워둔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프라이드




삼촌의 프라이드에 처음 시동을 걸었을 때, 그때 들었던 엔진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미 햇수로 꼬박 18년이 되었고, 계기판에 나와 있는 주행거리는 47만 킬로미터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프라이드의 엔진은 부드럽고 조용하게, 마치 난로 위 주전자처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라이드는 이제 화자의 손으로 들어간다. 삼촌이 애지중지 관리했기에 상태는 좋았지만 중대한 결함이 하나 있었다. 바로 후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진을 하려면 차에서 내려 손으로 차를 밀어야만 했다. 이제 갓 이십 대가 되어 놀러 다닐 생각만 가득한 화자에게 그런 결함 따윈 문제 되지 않았다. 고치려면 차값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는 후진불능 프라이드를 손으로 밀며 화자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삼촌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왜 이 차는 후진이 되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 속에 한 가지씩 여백을 두고, 그 여백을 채우려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법인데, 그게 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자리인데, 그때의 나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자는 삼촌이 남긴 차계부를 실마리 삼아 삼촌의 행적을 추적하고, 가족 중 누구보다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렇게 다가가던 화자가 마주한 건 삼촌이 살았던 삶의 여백이었다. 어쩌면 의도하여 만든 여백, 바로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자리였다.


순간, 그토록 궁금해했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을 코앞에 둔 채, 화자는 그만 멈추어버린다. 어떤 이야기는 여백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므로, 빈 공간으로 남겨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이라는 제목은 밀어버릴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아이러니처럼, 여백으로 남겨놓아야 이야기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아닐까. 그곳이 바로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곳 아닐까.



나는 허리를 더 아래로 깊숙이 숙인 채, 프라이드를 밀었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삼촌은 이렇게 직접 민 것 또한 노트에 적어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 거리를 과연 어떻게 잴 수 있는 것일까.



※ 이기호는 이 작품으로 제11회 이효석 문학상(2010)을 받았다.

※ 이 작품은 이기호의 세 번째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2013)에 수록되어 있다.

※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로도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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