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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Jan 24. 2021

오해가 걷히고 이해가 시작되는 순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레이먼드 카버

생일날 뺑소니를 당해 정신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는 스코티, 부모인 앤과 하워드는 교대로 집을 들르고 한밤중에 기분 나쁜 전화를 받는다. "스코티 일은 잊어버리셨소?"라며 비아냥대는 목소리의 주인은 전화를 받는 이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고 찾아가지 않는 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이죽거릴 뿐이다.


스코티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앤과 하워드는 깊은 밤중에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빵집으로 향한다. "그애는 죽었어요. 그애는 죽었다구, 이 못된 놈아!"라고 쏘아붙이는 앤,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며 독설을 내뱉는 하워드에게 자초지종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횡성수설하며 미안하단 말을 건넨다. "나는 빵장수일 뿐이라오. 다른 뭐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소.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들의 변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빵집 주인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앤과 하워드에게 따뜻한 빵을 내온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셋은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실린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원제는 <A Small, Good Thing>인데 소설가 김연수가 번역을 하며 제목을 저렇게 바꾸었다. 카버의 건조한 문체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참 문학적인 표현이고, 제목 잘 짓는 김연수 다운 번역이다. <작지만 좋은 일>, <작고 좋은 일>, <작지만 좋은 것> 등으로 번역했다면 이같은 울림이 있었을까.


이 짧은 소설은 오해에 대해, 연대와 공동체에 대해, 작은 일의 소중함에 대해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소설의 첫 부분, 앤은 빵집에 들러 스코티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는데 영 퉁명스럽고 "쾌활하지 않"은 빵집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그의 허접한 용모를 살피며 빵장사가 되는 일 말고 그의 삶에서 다른 걸 해보기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반면 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태닝한 얼굴에 어깨가 떡 벌어진 미남"이고, "회색 머리칼을 머리 양쪽으로 잘 빗어넘겨서 이제 막 연주회라도 갔다 온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내 의사는 앤을 실망시키고, 빵집 주인은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앤/하워드와 빵집 주인은 몇 번이나 통화를 나누면서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주문한 케이크가 완성됐으니 찾아가란 말, 집안에 일이 생겼으니 나중에 찾아가겠다는 말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이런 오해들이 특별한 건 아니다. 서로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 안에 갇혀 내리는 판단으로 생기는 오해는 우리 주변에 널렸다. 직장이나 가족들 사이에서 무수히 오가는 뒷담화들이 결국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카버는 오해의 절망스러운 단면을 보여주지만 이내 그 오해가 이해로 승화하는 순간도 그려낸다. 빵을 나누고 대화를 나눌수록 앤/하워드와 빵집 주인을 가로막은 오해는 차츰 희미해진다. 앤과 하워드는 "지치고 비통했으나, (...)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자 귀를 기울인다.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비로소 이해의 지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들을 이어준 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빵조각 몇 덩이에 불과하다. 마치 성만찬과 같은 종교적 제의를 통해 그들은 이제 한몸이 된다.

오해가 걷히고 이해가 시작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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