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놀라 홈즈 - 밀리 바비 브라운의 성장, 그러나>

내 멋대로 영화 보기 001

by 이필립

넷플릭스에서 새로 등장한 작품이 있다고 해서 봤다. 바로 에놀라 홈즈. 제목에서 셜록 홈즈와의 연관성을 알아차린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감상했다.

영화 에놀라 홈즈의 포스터 (출처 다음 영화)



영화의 스토리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시골에서 어머니의 손에 자란 딸이 사라진 엄마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다.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으로 알려진 밀리 바비 브라운이 연기했다.) 다만 이 딸은 조금 독특하게 자랐다. 어머니의 교육 철학 때문에 격투기를 익혔고, 암호풀이에 능하다. 에놀라라는 이름도 ALONE라는 영단어의 철자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최근의 시류인 여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10대 여성의 모험담을 담은 하이틴 무비다. 다만, 그 여성이 홈즈가의 막내 여동생이다.



이야기의 초반에는 이 여성이 홈즈 가(家)의 사람이라는 점을 빼더라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초반에 딱히 그 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머니가 사라지고, 두 오빠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굳이 홈즈가의 막내 여동생이란 설정을 가져와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시골 저택에서 자란 10대의 여자 아이가 웬만한 사람들보다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려면 홈즈 가의 DNA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에놀라 홈즈를 맡은 밀리 바비 브라운. 그녀는 친언니와 함께 제작에도 참여를 하였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만약 이 작품이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영화를 보는 데 망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원작이 존재한다. 낸시 스프링거의 시리즈물이다.)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캐릭터에 새로운 가계도를 첨가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식이 아니다. 잘못하면 원작을 훼손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원작의 팬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성공한 작품에 기대어 편하게 가보려는 꼼수로 비쳐지기 쉽다. (원작은 아서 코난 도일 재단에게 소송을 당했고,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에놀라의 추리 장면을 BBC의 유명 드라마 <셜록>과 유사한 방식으로 연출하였다. 그걸 따라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으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설정 때문에 재미있는 인물이 한 명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홈즈 형제의 어머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했다.) 셜록과 마이크로프트를 키워낸 어머니라니, 원작 팬들에게는 오히려 그 점에 관심이 갈 것 같다. 이 어머니는 다재다능할 뿐 아니라 당시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녀가 홈즈 형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유추해볼 수 있는 지점은 이 영화가 (동시에 원작이) 가진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다.



영화는 인물의 성장을 설명하고 어머니의 비밀을 엿보게 되는 초반을 지나, 에놀라 홈즈가 런던에 도착하는 장면까지 힘 있게 진행된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깔끔하며, 리듬감 있는 편집과 주인공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개입이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하이틴 무비가 가진 특성에 거부감이 없다면 영화가 가진 유쾌한 분위기, 매력적인 이성과의 만남, 그리고 모험들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충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허나 이 이야기는 도중에 급격하게 힘을 잃는다. (사실 미완에 그치는 영화의 대부분이 엉뚱한 곳으로 새면서 스스로 자멸한다.) 그 분기점은 주인공이 여성 기숙 학교로 끌려가는 중반이다. 당연히 이야기는 주인공이 학교 교육 속에서 얼마나 힘들어 하는가에 맞춰질 것이다. 이것이 끝없이 튀어 나가던 영화의 발라함과 에너지, 1시간 가까이 만들어왔던 흐름을 끊어버렸다.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게는 누군가 도움을 주는 인물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통 하이틴 무비에서 그 인물은 상대 배역인 이성 캐릭터(듀크스베리)다. 그가 끼어들면서 영화는 에놀라의 어머니 찾기에서 벗어나 듀크스베리의 사건으로 완전히 초점을 옮긴다. 그 사건에 등장하는 반전과 배후의 음모 또한 영화가 내세운 여성주의과 깊게 관련이 있지만, 그 의미를 떼어놓고 보았을 때 이야기로서 훌륭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보여주던 모든 매력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 다음 단락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볼 예정인 사람은 스크롤하여 내려가길 바랍니다.



영화의 진행대로라면 영국 사회를 기존 틀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한 여성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죽인다는 것인데, 글쎄, 이 이야기에 동의할 수 있는가? 사건을 여성 참정권 문제와 연결 짓는 것은 좋았다. 허나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이야기는 무리한 선택을 하였고, 그 서사로 영화는 망가지고 말았다.

차라리 어머니를 찾는 애초의 이야기로만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시리즈의 일부분을 가져오다 보니, 동시에 후속작에 대한 가능성을 내포하려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도리어 어머니 캐릭터가 가진 비밀과 활동 내용이 흥미로웠다. 어머니가 일으키려는 사회의 변화, 거기에 관여된 수많은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비밀 단체며 그들의 활동을 쫓게 된다는 이야기였다면, 그래서 그것이 결국 여성 참정권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맞닿게 된다면 이 영화는 더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폭탄은 왜 있었던 거냐고!) 하지만 서사는 너무 곁가지로 새고 말았고, 어머니에 대한 미스터리도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끝나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 매력적인 어머니 캐릭터가 막판에야 등장한다는 점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그것도 모험을 끝낸 주인공을 안아주기 위해서라니. 지나치게 미국 가족 영화적이고, 틀에 박힌 활용이다.



* 스포일러 구간이 지났습니다. 다음 단락은 안심하고 읽어도 됩니다.


두 남녀 주인공은 자신들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루이스 패트리지는 차세대 스타의 발견.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결국 이야기를 선택하여 집중하는 문제에서 이 작품은 실패했다. 시대적으로 유의미한 영화의 태도나 재미있는 캐릭터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스스로 망쳐버렸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주요 서사를 혼란스럽게 한 점, 저작권 논란에도 불구하고 셜록 홈즈라는 설정을 가져온 점이 패착으로 생각된다. 이 영화를 봐야 하는가, 라고 주변 사람이 묻는다면 나는 굳이 볼 필요는 없다고 대답하겠다. 단, 여성주의를 다룬 작품을 살펴보겠다든가, 배우들이 좋아서 보겠다면 말릴 방도는 없다. 특히나 여주인공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루이스 패트리지에게 반했다면 더더욱. 남자인 내가 봐도 매력적이었으니까.



1.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설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이틴 무비의 전형성에 거부감이 없다면 추천.

2. 셜록 홈즈의 팬이거나 이야기의 개연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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