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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Jun 02. 2023

100번째 글을 저에게 바칩니다

문득 소재가 떠올라서 브런치에 들어왔는데 이번 글이 100번째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주문하세요!' 하고 외칠 때를 제외하고는 시청자와 소통이 없는 것 같은 홈쇼핑 방송을 대신해서 홈쇼핑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면서 독자들에게 다가가자라는 생각에 시작한 브런치는 정말 수많은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홈쇼핑과 라이브커머스 업계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취업준비생들이 용기를 내어 연락을 주셔서 직접 만나기도 했고 업계 관계자분들이 글을 보고 연락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판로를 개척하고 싶은 많은 사장님들이 고민과 함께 컨설팅을 부탁하시기도 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는, 고맙다는 그 말에 동기부여가 되다보니 글에 항상 정보가 있어야 하고 뭔가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서 제 글을 보는 분들이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글 하나를 쓸 때도 조사와 자문을 받으며 홈쇼핑과 라이브커머스에 대한 인사이트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이 점점 딱딱해졌고 제가 원래 좋아했던, 업계에 있으면서 경험했던 에피소드나 귀한 인연들을 소개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100번째 글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정말 제가 즐거운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홈쇼핑 PD로 일을 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저를 구해준 한마디에 대해 말해보고 싶습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메인 PD로 일을 하게 되면서 앞서간다는 기쁨은 잠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준비 기간을 갖지 못한 신입 PD의 미숙한 진행에 눈총을 보내는 스탭들, 답답해하는 쇼호스트 선배들, 참혹한 매출에 아연실색하는 MD들.

그보다 저를 힘들게 한것은 협력사 관계자분들의 분노였습니다. 본인들은 인생을 걸고 시작한 홈쇼핑 방송인데 재수 없게 신입 PD를 만나서 방송을 망치고 매출이 나오지 않았다는, 직접 말은 하지 않지만 방송 후 표정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그 표현들은 매일 저를 갉아먹었습니다. 


중요한 방송들인데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매일 죄책감을 느꼈고 생방송 진행이 아닌, 방송의 인서트를 만드는 부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매주 배정되는 방송 리스트를 보면 겁이 났고 회의를 들어가기도 전에 덜덜 떨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며 제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그 누구도 그때는 그럴 수 있다고, 방송을 하다 보면 감이 생긴다고, 그러면서 서서히 신뢰를 얻어가는 것이라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매일매일이 저 혼자만의 싸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모 두유 상품 방송이 배정되었습니다. 히스토리를 들어보니 다른 홈쇼핑에서도 매출이 좋지 않았고 저희 회사에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고민이 많은 상품이었습니다. 


'아....매출이 안 나오면 또 내 탓이 되겠구나.. 아니야, 원래 어려운 상품이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혼자 온갖 생각을 하며 회의를 들어갔는데 시작도 전에 우울한 표정의 MD와 두유 회사 대표님이 저를 맞이해주셨습니다. 


"상품은 참 좋은데..매출이 안 나옵니다.. 두유 카테고리가 그래도 소비자들 수요가 있거든요.. 저희도 참 답답합니다.."


"그래도..저희가 참 야심차게 만든 두유입니다. 정말 저희 애도 먹이고 있을만큼 좋은 재료로만 만들었고 대학 교수님들 자문도 받았고요..단지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단맛은 안 납니다. 혹시 그것 때문에 매출이 안 좋은 걸까요?"


넋두리에 가까운 상품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맛이라도 보라며 쥐어주신 두유 한팩을 가지고 자리에 와서도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MD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해봤는데 이번 방송만 하고 빼려고 합니다. 매출도 좋지 않고..딱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네요. 그냥 부담 없이 방송하세요"


전화를 끊는 순간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뻔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부담 없는 방송이라니. 들뜬 기분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려던 바로 그 순간 회의실에서 봤던 대표님의 표정이 떠오르고 제 직업의 존재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상품이라도 가치를 만들어서 소비자들에게 소개하고 판매하는 것이라는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방송 하나는 부담 없이 할 수 있겠지만 결국 홈쇼핑 PD로서의 저는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는 말자고, 방송 결과는 좋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는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대표님께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한 교수님들이 어떤 분들이 있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제가 졸업한 대학의 교수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졸업생이며 이런 일을 하는데 이런 상품 때문에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 1시간만 시간을 내어달라는 제 메일에 교수님은 답이 없었습니다. 방송은 다가오는데 초조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교수님. 전에 메일 드렸던 졸업생입니다. 00 두유 상품에 자문을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상품에 관련해서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염치불고하고 잠깐 뵐 수 있을지요?"


"...사무실로 오세요"


한동안 정적 후 교수님의 짧은 답변에 혹시 몰라 촬영 장비도 챙겨 부랴부랴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 두유가 다른 상품과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지 여쭤보았습니다. 제가 나름 연구한 자료들을 보여드리고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말하자 교수님도 흥미가 생겼는지 의자를 당겨 앉았습니다. 교수님이 굳이 이 두유 상품에 자문을 해주고 상품개발에도 일부 참여했던 이유는 다른 두유와 다른 품종의 콩을 쓰고 실제 그 콩이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학술 연구가 있으며 첨가물 등을 거의 넣지 않아 단맛이 나지 않는 것이 본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본인 자녀에게도 먹이고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심의 상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의 양해를 구하고 말씀 그대로를 인터뷰로 땄습니다. 그날 밤 교수님은 수험생인 자녀분들이 두유를 마시고 있는 모습도 선뜻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셨습니다.


방송의 컨셉을 아이들이 꼭 먹어야 하는 두유로 바꾸고 다른 두유와의 차별성을 강조했습니다. 약간의 재미를 위해 실제 예전부터 종종 이 두유를 마셔오던, 모 명문대를 나온 직원의 이야기도 넣었습니다.


교수님의 차분한 인터뷰가 방송으로 나가고 그 자녀분들이 두유를 마시는 모습이 방송에 노출되고 명문대 직원의 깜짝 출연까지 이어지며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방송의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 식사대용으로 어필을 하던 지금까지 방송과 다르게 아이들의 타겟으로 삼은 것이 주효했는지 매진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회사에서 정한 목표 매출을 약간 상회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평소와 같이 조심스럽게 리뷰 회의에 참석을 했는데 MD와 대표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다음 방송이 확정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일어서는데 대표님이 머뭇거리며 한마디를 했습니다.


"PD님. 가능하다면 다음 방송도 꼭 PD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서는데 정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메인 PD가 되고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매일 실패하는 방송에 주눅 들고 능력 없는 PD라 자책하고 있던 저에게는 처음 이 직업에 대한 보람과 가치를 찾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꼭 협력사분들이 다시 찾고 싶은 PD가 되자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물론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존재가치를 믿지 않고 일하던 때와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때 그 대표님의 한 마디가 제 홈쇼핑 커리어를 바꾼 것이라고 믿습니다.


2019년 처음 시작한 브런치의 100째 글을 홈쇼핑 PD로 열심히 살아온 저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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