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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Sep 01. 2023

생리대를 차는 남자 - 상편

홈쇼핑의 주요 고객이 여성이다 보니 당연히 홈쇼핑에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상품이 많습니다. 

홈쇼핑 PD는 당연히 이런 상품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하고 최대한 여성들의 감성에 맞게끔 방송을 연출하여 매출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런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가끔 남자 PD들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을 것만 같던 상품을 백지상태에서 공부하고 심지어 그것을 잘 아는 고객들을 설득해서 판매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험이 많이 쌓이고 보고 듣는 게 많아지게 되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갓 메인 PD를 잡고 방송을 시작하는 남자 PD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이 기간 동안에는 남자 PD들에게 식품이나 가전, 무형 상품 등의 방송을 배정하며 배려 아닌 배려를 하기도 합니다.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저는 선배들의 줄퇴사와 질병으로 인한 공백 등으로 홈쇼핑 PD가 배움과 경험을 쌓고 메인 방송의 PD로 투입되는 일반적인 기간보다 1년 이상 빨리 방송에 투입되었습니다. 잘해보고 싶다는 의욕도 앞섰지만 경험의 부족한 신입 PD에 대한 타 부서와 협력사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이겨내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팀장님의 긴급한 호출에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어려울 수도 있는데.. 이번에 론칭하는 생리대 방송을 네가 좀 해야 할 것 같다"


생리대 방송이라니.. 써보기는커녕 태어나서 몇 번 만져본 적도 없는, 여성들만을 위한 그런 상품을 심지어 론칭해야 한다니..

차라리 김치 방송을 3개 더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 못 한 채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MD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PD님~ 이번에 생리대 방송 (크큭) 맡아주신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시각으로 잘 좀(크큭) 부탁드립니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상품에 대한 간단한 히스토리를 전하는 MD와의 통화를 마치고 타 홈쇼핑에서 근무하는, 한때 제 동기였던 여자 PD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이번에 생리대 방송을 하게 되었는데 생리대 관해서 뭐 좀 많이 물어봐도 될까...? 날개... 가 뭐야? 생리대가 날아가지는 않을 테고"


"아 진짜 이 오빠가 미X나..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봐!! 끊어!!"


당황해하며 황급히 전화를 끊는 동기의 모습에 이번 방송이 매우 쉽지 않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방송을 위한 첫 회의 때 저를 본 생리대 브랜드사의 젊의 여성 직원분 역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아.. 일단 생리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거죠? 일반거랑 오버나이트 차이 같은 것도 전혀..?"


"네.. 거의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제 모습을 보며 MD가 박장대소를 하며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아 대리님. 남자분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어요. 잘 좀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이 생리대는요.. 아니 PD님 생리대를 좀 쳐다보세요. 이렇게 만져보시기도 하고요. 어허 손 빼지 마세요!"


생리대의 종류부터 특징, 브랜드까지 1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들으며 필사적으로 받아 적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어쩔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누르며 어쩌면 팀장님이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성품이 좋고 방송도 잘하기로 소문난 선배 쇼호스트와 방송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나름의 공부 끝에 방송을 어떻게 할지 정한 후 선배와 미팅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강조 후에..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주문을 받으면 어떨까 합니다. 선배님"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만 있던 선배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습니다.


"상품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나 이렇게는 방송 못하겠다"


전에 없던 선배의 단호한 모습에 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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