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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Sep 06. 2023

생리대를 차는 남자 - 하편


"선배님, 혹시 방송 방향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수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점이 부족한지 알려주시면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쇼호스트 대기실로 향하는 선배의 뒤를 따라가며 저는 다급히 말했습니다. 


"홈쇼핑 방송이 이런저런 말이 많고 이미지가 안 좋아도 왜 매출이 좋은지 아니? 단순히 상품을 설명하고 싸니까 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공감해 주고 구매했을 때 나의 생활이 어떻게 될지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야. 네가 말한 방송 내용은 그냥 상품 상세페이지 내용에 몇 가지 꾸밈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생리대니까 어차피 남자인 난 잘 몰라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차분한 선배의 말에 좀 더 고민해서 다음 주에 찾아뵙겠다는 것 외에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생리대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포장지에 적혀있는 문구들을 읽어보고 심지어 타 브랜드 생리대를 몇 개 사 와서 무슨 차이가 있나 비교해 보면서 상품을 이해하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그렇게 주말이 되었고 멍하게 누워 방송 고민을 하던 중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직접 생리대를 차 보자...... 그 방법뿐이다...'


인터넷에 '생리대 차는 법'을 검색해 보며 떨리는 첫 생리대 경험을 시작했습니다.


"포장을 뜯고 잘 펼쳐서.. 접착제 있는 부분을 이렇게 팬티에 붙...아..삼각팬티가 필요하네.."


(잠시 후 편의점에서 삼각팬티를 사 왔습니다)


"이렇게 붙이고 날개를 바깥쪽으로 접어서 감싸듯이.. 아 되게 작네.. 대형 아니 오버나이트로 해야겠다"


어렵게 팬티에 생리대를 장착(?)하고 첫 착용을 해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보송보송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단지 생리대를 붙이고 팬티를 입다 보니 그 과정에서 생리대가 좀 틀어져서 딱 맞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타 브랜드 생리대도 같은 방법으로 착용을 해보았습니다. 솔직히 다 부드럽고 느낌이 좋아서 그냥 제일 싼 거 사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생리대에 물을 반 컵씩 붓고 다시 착용을 해보았습니다. 뭔가 축축하고 무거워진 느낌이 불쾌했습니다. 다만 타 브랜드에 비해 제가 판매할 생리대는 축축한 느낌도 덜했는데 브랜드사가 그렇게 강조하던 특수 패드가 흡수율의 차이를 가지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란 색깔의 이온 음료를 흐를 때까지 부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제가 판매할 생리대가 최후까지 이온 음료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설명만 들을 때와 실제 경험을 해볼 때는 그 이해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얇은 바지를 입어보았는데 정말 흉측할 정도로 생리대 태가 잘 보여 외출해서 걸어보자는 계획은 포기했습니다(제가 남자여서 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몇 번을 비교해 보아도 타브랜드에 비해 제가 판매할 생리대를 그 느낌이 덜했는데 흡수를 하고도 크게 부풀어 오르지 않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흡수율이 좋아도 새로 교체한 생리대의 보송보송한 느낌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한 나절 넘게 요상한 실험을 하고 그것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중 비교 실험이 잘 된 영상을 심의팀 허락을 받아 방송에 활용했고 남자가 생리대를 연구하는 모습 또한 재미있고 신뢰를 줄 것 같아 하나의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방송 곳곳에도 남자 PD가 생리대 방송을 해서 민망하고 어색해서 고객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장치를 심어두었습니다. 


또한 선배와 MD에게 주말 동안 생리대를 연구한 결과를 공유하고 정말 이 상품이 우수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방송할 수 있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더불어 저희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은 조금이라도 더 보송보송한 느낌을 가졌으면 하는 의미에서 생방송 중 생리에 대한 힘든 경험을 공유해 주시는 고객들에게는 한 박스 더 제공하는 이벤트를 꼭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다행히 브랜드사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회심의 준비 끝에 시작한 방송은 영화나 드라마의 결말과 달리 매출의 관점에서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역시 생리대 방송은 여자 PD가 하는 게 맞겠다 생각하며 리뷰 회의를 들어갔는데 쇼호스트 선배와 MD 그리고 브랜드사까지 지금껏 단순히 구성 강조만 하던 방송만 하다가 너무 재미있게 방송을 했다며 다음에 조금만 더 보완해서 방송을 해보자는 격려의 말을 건네었습니다.


2주 뒤 다시 돌아온 방송은 40분 만에 매진이 되었고 회사 생리대 방송 역대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회사가 방송하는 모든 생리대 브랜드 방송을 제가 맡게 되었고 저도 당당하게 생리대 전담 PD라고 말하며 MD와 브랜드사와 생리대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후 저는 여성 전용 상품 방송을 하는 것이 재미있어졌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느낌으로 네일도 해보고 여성 백도 가지고 다녀보면서 제가 알지 못하던 분야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홈쇼핑 회사의 묘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 나와는 상관없던 상품부터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상품까지 접하며 대체 이건 뭐지 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하다 보니 20대 중반의 청년은 어느새 40에 가까운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방송 하나하나 상품 하나하나에 얽힌 추억들은 아직도 저를 즐겁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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