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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Aug 09. 2024

6화 단 한 장의 티켓을 거머쥔 건 나였다

나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홈쇼핑 PD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홈쇼핑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냥 PD를 뽑는다기에 지원을 했고 운 좋게 서류는 합격을 했다. 면접 일정을 받고 나는 홈쇼핑을 열심히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쇼호스트들이 나와서 열심히 물건을 파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매진이 될 것 같다고 하며 사람 혼을 빼놓는 까닭에 모니터링을 하는 와중임에도 무언가 구매할 뻔한 적도 있다. 그렇게 홈쇼핑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던 와중 자기소개 1분으로 면접이 시작된다는 정보를 얻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름 무기가 많고 나의 소개를 흥미롭게 들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면접 당일. 정보에 빠른 지원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면접 인원만 100명이 훌쩍 넘는다고 했다. 그중에서 돋보이려면 단순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내 순서가 다가오기까지 기껏해야 10분 남짓.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내었다.

홈쇼핑 회사니까 나를 파는 것처럼 소개를 해보면 어떨까? 이왕이면 방송하는 것처럼 쇼호스트처럼 말을 해볼까?

시간이 없었기에 다른 아이디어를 낼 시간이 없었다. 되는대로 내 이야기와 모니터링했던 쇼호스트들의 멘트를 조합했다.


미처 연습도 못해봤는데 내 순서가 되었다. 나는 6명의 후보자와 함께  면접실로 들어갔다. 근엄한 표정의 면접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입사 면접은 이런 분위기구나. 괜히 이상한 걸 준비했나 싶어 후회가 되었다.


"제일 앞 후보자부터 자기소개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정보가 틀리지는 않았다. 다들 예상이나 한 듯 깔끔한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갈등이 되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갈까 아니면 모험수로 쇼호스트 버전으로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생각을 하던 와중이라 내 차례가 온 줄도 몰랐고 갑자기 면접실이 조용해지고 내 옆의 지원자가 나를 쳐다보자 나도 모르게 급히 준비한 쇼호스트 버전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보여드릴 상품은 저입니다. 외관만 봐도 참 구매하고 싶게 생겼는데요. 기본구성으로 PD에 최적화된 전공과 경험이 있고요! 추가 구성으로 각종 학교 축제 등에서 상품을 팔아본 노하우가 있습니다. 오늘 특별 사은품으로 영화배우 도전 등으로 똘똘 뭉친 열정까지 드립니다!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내 소개가 끝났을 때 양 옆에 있던 지원자들이 당황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이력서를 쳐다보고 있던 면접관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내 소개가 끝났고 다음 지원자는 나를 부정하듯이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잘했다 보다는 망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미 저질러 버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놀랍게도 나는 합격문자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자기소개가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쉽게 사회의 일원이 되다니. 역시 나는 슈퍼맨이야.


"여러분은 3개월 인턴으로 재직하게 되며 평가를 통해 일부 정직원으로 전환됩니다"


나의 알량한 자신감은 출근 첫날 인사팀 담당자의 한마디에 박살이 났다.


정규직이 아니라 인턴이라니?? 내가 공고를 잘못 본 건가??


이 프로세스의 가장 난감한 점은 3개월간 이 회사에 묶여 있으니 다른 모든 회사의 채용에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과정을 진행하고 최종 전환이 되지 않으면 1년을 허비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다.


총 12명의 합격자 중 2명은 인사팀의 안내를 받고 입사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큰 고민이 되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하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총 10명이 정규직 전환을 위해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지만 어쩌면 시한부 채용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동기라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쟁 상대들이기 때문에 친하지도 안 친하지도 않은 관계라는 점이 회사 업무에 의욕적으로 임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지난해에는 최종적으로 3명이 전환이 되었어요"


만약 입사를 하게 된다면 1년 선배가 되는 직원들이 슬쩍 이야기를 해주었다. 작년과 같다 하더라도 30%의 확률이었다.

다들 은근슬쩍 경쟁심을 드러냈고 보이게 안 보이게 감정싸움도 했다. 촬영에 경쟁적으로 따라나가려 한다든지 문서 작업을 도맡아 한다든지 업무보다 직원들과의 관계를 충실히 쌓으며 다른 인턴들보다 본인이 우위인 점을 어필한다든지 가지각색의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오히려 튀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촬영 현장도 적당히 나가고 업무들도 나서서 맡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남은 시간을 내 담당자에게 부탁하여 회사 실무자들을 소개받고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는데 활용했다.


"카탈로그는 요즘 어떻게 나가고 있을까요?"

"여전히 잡지형태로 나가고 있는데 이게 점점 요청이 적어져서 고민이네요"

"저희 쇼핑 앱은 출시가 되나요?"

"이제 막 출시가 되었고 다운로드를 유도하기 위한 작업들을 구상하고 있어요. 이제 스마트폰이 좀 보편화 되어가고 있거든요"

"TV 홈쇼핑 매출은 여전한가요?"

"계속 성장하고 있죠. 그런데 그 성장폭이 조금씩 줄고는 있어요"

"아까 매진 예상이었던 것 같은데 다 팔리진 않았네요?"

"상담 주문이 너무 밀려서 오히려 전환 속도가 떨어졌어요. 자동주문 전화 강조를 해도 다들 상담을 하네요 허허"


이렇게 나는 현재 홈쇼핑 동향을 파악하고 더불어 회사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을지를 추론해 보았다. 


그 이유는?


인턴 마지막 주 최종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선한 아이디어보다는 실제 실무에 적용할 수 있거나 현재 회사가 하고자 하는 업무 방향과 맞는 전략을 제시하고 싶었다.

아쉽게도 나는 가장 마지막 순번에 배치가 되었다. 1번부터 9번이 발표를 마치기 전까지 꼼짝없이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실무를 경험해 본 직원이라고 판단하는지 현실성 없는 전략이 나오면 면접실에서는 고성이 나왔다. 경쟁자가 못하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는 나 역시 저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드디어 나의 발표 차례. 나는 당시 유행했던 해운대 영화 포스터로 발표를 시작했다.


"쓰나미가 오기 전까지는 너무 평화롭습니다. 쓰나미가 오고 나서 도망치고 막아봐야 큰 피해는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현재 홈쇼핑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황이라고는 하나 지금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결국 쓰나미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홈쇼핑의 디지털 전환을 강조했다. 내 아이디어라기보다는 두루두루 만난 실무자들의 생각을 정리한 수준이었다. 비용만 들어가는 카탈로그는 전자책 형태로 제공하자든지 밀리는 전화주문 대신 앱 주문을 활성화시키자는 등등.


특별한 아이디어라기보다는 회사에서도 이미 관심을 가지고 혹은 물밑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들일 것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일들을 이해하고 같은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다행히 고성이 나오지는 않았고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망의 최종 면접. 인턴이 진행된 PD 직군과 달리 다른 직군들은 일반적인 전형에 따라 1차 면접 이후 최종 면접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그 일정 마지막 말 마지막 순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도 포기한 2명을 제외한 8명이 한 면접실로 들어갔다. 일주일가까이 진행된 최종 면접의 마지막 타임. 면접관 모두가 지쳐 보였다. 그리고 시작된 면접.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질문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두 개 이상씩 질문을 받을 때도 나에게는 질문이 없었다. 갑자기 PD로서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 순간이 언제인지에 대해 질문이 들어왔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라 다소 평범한 답변을 했다. 야속하게도 슈퍼맨의 힘은 오늘은 아닌가 보다. 그렇게 면접 시간이 끝나기 직전 회사의 대표는 불쑥 나에게 다소 황당한 질문을 했다.


"지원자는 어디 사나요?"


이게 무슨 최종면접 질문인가 싶었다. 양 옆의 면접관은 서류를 탁탁 치며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일말의 분노감까지 느끼며 단답형으로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내가 말할 기회가 아닌가. 


"저는 신촌에 삽니다. 신촌 중에서도 연희동에 사는데 이 회사의 배송 우선순위 지역인 것 같습니다. 여기 방송을 보고 주문을 하면 매번 000 기사님이 아침에 택배를 전달해 주십니다. 저는 기사님들 가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는 편인데 배송 트럭에 회사 로고가 크게 박혀있으면 브랜드 인지도 상승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일순간 느슨했던 면접관들이 나를 쳐다봤다. 


"아 네 답변 잘 들었습니다. 제안 주신 건 한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면접관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면접은 끝이 났다.


사실 개인적으로 합격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주일 간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광화문 카페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인사팀입니다.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마치 당연하듯 이야기하는 인사 담당자의 말에 기쁘기도 했고 또 어떤 동기들과 함께 일을 할지 궁금했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나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오늘 전화받았는데 다들 어때?"


메시지 확인은 점점 늘어나는데 아무도 답은 없었다. 심지어 한 명씩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정식 출근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해 상반기 PD 공채 합격자는 단 한 명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만 대의 일을 뚫은 유일한 합격자가 되었다.


역시 슈퍼맨 내 안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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