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와 비교가 안 되는 홈쇼핑 PD라고 해도 방송을 이끌어가는 지휘관임은 변함이 없다. 생방송이 시작되면 모든 스태프들이 PD의 콜만 기다리기 때문에 오히려 공중파보다 더 많은 경험과 순발력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래서 최소 2년 정도 선배 PD를 따라다니며 일도 배우고 사람 얼굴도 익히고 방송이 기획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입사 후 배정된 팀은 초반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달 만에 2명이 퇴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3달 뒤에는 1명이 암으로 병가를 신청했다.
하필 그때쯤 우리 팀의 성수기가(방송이 많아지는 시기) 시작되었고 팀장은 급하게 충원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선배 PD들이 과도한 방송으로 지쳐갈 때쯤 팀장이 나를 불렀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되었지?"
"이제 8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팀 상황 알지? 좀 빠르게 준비해서 다음 달에는 메인 PD로 방송을 하자"
2년을 배우고도 초기에는 헤매는데 1년도 안되어서 메인 PD를 하라니.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팀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선배 한 명이 붙어서 집중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회의할 때 이건 꼭 확인해야 하고.."
"자막 쓸 때 심의팀 꼭 참조 넣고..."
"영상 확인은 여기서.."
쏟아지는 정보에 정신이 없었지만 프로세스야 얼마든지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방송 진행이었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간들 처음부터 60분 방송을 실시간으로 디렉팅 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분단위 큐시트를 만들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무슨 일이 생기든 그냥 그대로 진행을 하려고 했다. 나름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빼곡히 적은 큐시트를 닳도록 보고 또 봤다.
방송 당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사전 미팅을 진행하고 부조정실에 앉았다. 긴장 안 하는 척을 했지만 큐시트를 든 내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스태프들과 쇼호스트에게 오늘 방송이 조금 매끄럽지 않을 수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고 온갖 화면과 멘트가 부조정실을 채웠지만 나에게는 오직 큐시트만 보였다. 기계처럼 큐시트를 읽으며 디렉팅을 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생방송은 언제든지 변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쇼호스트의 멘트가 예상보다 짧을 수도 있고 상품을 시연하는 장면이 의외로 길어질 수도 있다.
지금쯤 공중파 광고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아직 전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사실상 초반 5분 정도 외에는 큐시트가 쓸모가 없어졌다.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피디님! 인서트 끝나갑니다! 그다음 뭘로 갈까요?"
"피디님! 다음 시연 가시나요? 안 가시나요?"
"피디님! 심의팀 정정 요청 왔는데 지금 내보내나요?"
"피디님! 쇼호스트 대화 요청이요!"
모두가 나만 찾는데 그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몸이 굳은 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걱정되어서 몰래 들어온 선배 PD가 간신히 사태를 수습해 주었다.
방송이 끝나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음에도 녹초가 되었다. 선배 PD의 격려도 MD와 업체의 볼멘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방송도 그다음 방송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배 PD가 굳이 안 있어도 될 수준이었지 진행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스태프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쇼호스트들도 내가 신입인걸 알기에 최대한 배려했지만 제발 상황에 맞게 영상과 자막을 노출해 달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내가 메인 PD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한창 배울 시기인데 전면에 나서서 욕을 먹는 기분이었다.
'슈퍼맨 네가 필요해'
처음으로 내가 먼저 슈퍼맨의 힘을 찾았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선배들의 방송에 들어갔다. 방해하지 않으면서 마치 내가 진행을 하듯 시물레이션을 반복했다. 매끄러운 선배들에 비해 여전히 삐걱거렸지만 조금씩 그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2주 뒤 방송. 처음으로 아무 문제 없이 방송을 마무리했다. 사실 홈쇼핑 PD의 임무가 방송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아니라 매출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만 나는 실수 없이 방송을 해냈다는 것이 기뻤다.
진행에 익숙해지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니 스태프들과 쇼호스트들의 원성도 잦아들었다. 내가 대충 1인분을 하는 것 같자 팀장은 신나게 방송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그중에는 선배들이 다 기피하는 방송들도 다수 있었다. 강성 브랜드사의 방송이라든지 새벽 방송이라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애써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남의 말을 잘 듣고 방송에 잘 구현하는 것이었다.
강성으로 소문났던 브랜드사 직원들은 말하는 대로 넙죽넙죽 다 들어주는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나는 그것들을 다 준비하느라 죽을 뻔했지만.
신기하게도 그전까지 신통찮은 매출을 기록하던 상품이 계속 매출 목표 이상을 기록하게 되었다. 내가 한건 정말 브랜드사의 요청을 잘 듣고 방송 기획에 넣은 것 밖에 없었다.
본인들 요구도 잘 들어주고 매출도 잘 나오니 그 브랜드사는 대놓고 내가 방송을 해주기를 회사에 요청했다. 팀장에게 그것만큼 그럴듯한 핑계는 없었다. 영혼 없는 칭찬과 더불어 해당 브랜드사의 모든 방송을 내가 하게 되었다. 물론 계속 방송 매출은 잘 나왔다.
진짜 1인분을 하자 팀장은 이것저것 다른 방송도 나에게 주기 시작했다. 애매하게 매출이 나오는 식품류들이 대표적이었다. 시기가 맞았는지 내가 운이 좋았는지 선배들의 방송을 거의 따라 하다시피 해도 매출은 항상 목표 대비 20%~ 40% 가까이 더 나왔다.
매번 방송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선배들이 매출을 물어봤고 나는 늘 140% 정도라고 답을 했기에 한동안 내 별명은 140% PD였다.
처음으로 론칭 방송을 진행한 날. 매출은 신통치 않았지만 브랜드사 대표님은 나를 따로 조용히 불렀다.
"사실 다른 홈쇼핑사에서는 이만큼 나온 적도 없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 방송 계속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내 소관이 아니라는 겸손한 말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회의실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는데 옆방에서 MD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거 다음 달에 론칭하려고요"
"괜찮겠어? 시즌이 애매하지 않아?"
"그래서 지크 PD님 배정 요청하려고요"
"그럼 뭐 걱정은 없겠다"
나는 오늘 나를 위해 기획된 몰래카메라가 있나 하는 생각도 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빠른 시일 내에 한 명의 PD로 안착했고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다.
어느 순간 회사의 메인 타임 방송을 책임지는 PD로 그리고 큰 규모의 매출을 담당하는 브랜드사의 PD로 활약을 하게 된 것이다.
신입 때를 겨우 벗은 겨울. 팀장은 나를 불렀다.
"나도 예상은 못했는데.. 네가 우리 팀 에이스가 된 것 같다. 축하하고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리고 팀장은 나에게 최고 고과라는 선물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퇴사 때까지 놓치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도 슈퍼맨의 힘은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