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4년 차에 첫 이직 제안을 받았다. 홈쇼핑 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는 메이저 경쟁사의 포지션을 채우기 위해 헤드헌터가 연락을 해온 것이다.
"해당 홈쇼핑에서도 방송을 하는 브랜드사가 PD님을 적극 추천했습니다.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첫 이직 제안에 내가 엄청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헤드헌터는 나의 업무 히스토리와 강점, 성격 등을 매우 꼼꼼하게 물어봤다.
신나서 떠드는 내 이야기를 신중하게 듣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던 헤드헌터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혹시 연봉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시나요?"
드디어 그 순간인가. 이직 초짜로서 내가 주워들은 건 무조건 현재 연봉보다 20~30%는 높게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봉은 얼마이고 매년 인센티브가 이 정도 나옵니다"
나는 희망 연봉을 기본연봉과 인센티브를 더한 수준으로 제시를 했고 헤드헌터는 의견 잘 전달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날 저녁 헤드헌터로부터 빠른 회신을 받았다.
"제시하신 연봉이 회사의 과장 고연차 수준이라..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다른 좋은 기회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봉을 협상할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이직 제안을 순식간에 끝이 났다.
구직 플랫폼에 이력서 한 장 올려놓은 적 없었지만 그 뒤로도 종종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
브랜드사의 홈쇼핑 영업 담당, 브랜드사의 마케팅 담당, 신규 홈쇼핑의 CP 등 각종 소개와 기회로 소중한 이직 제안들을 받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최종적으로 이직을 결심한 적은 없었지만 슈퍼맨의 힘과 함께하는 특별한 내 존재에 대한 확신은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첫 이직 제안을 했던 경쟁사로 이직한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잘 지내니? 회사는 요즘 어때?"
"네 비슷합니다 하하"
"너는 어떠니? 안 힘들어?"
"남의 돈 먹는 게 쉽나요 뭐 하하"
"우리 회사 와라.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다. 너만 괜찮다 그러면 바로 인사팀보고 연락하라 그럴게"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던 선배이기는 했지만 회사에서 일을 같이 많이 하지도 않았고 이직 후 연락도 뜸했기에 제안이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그랬기에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PD님? 이렇게 연락을 드리네요. 사실 여기저기서 너무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인사팀 특유의 칭찬세례와 함께 제안이 시작되었다. 생활가전 쪽 매출을 책임져줄 PD를 찾고 있었다는 것과 먼저 연락을 준 선배의 적극 추천도 있었고 평소 진행해 오던 평판 체크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력서는 일단 형식적으로 주시면 될 것 같고 한번 리더분들과 미팅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정 주시면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경쟁사를 방문하여 임원, 본부장 등으로 구성된 면접관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면접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만 과제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실무 테스트가 꼭 필요해서 해당 내용 메일로 전달 예정입니다. 꼭 확인 부탁드리고 회신부탁드립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사팀 직원의 전화를 받고 메일을 열어봤다. 신규 무선 청소기 론칭을 성공하기 위한 작은 아이디어를 기획해 달라는 것이었다.
먼저 청소기의 스펙을 꼼꼼히 살펴봤다.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었고 대단한 기술이 있지도 않았고 성능도 여느 청소기와 유사했다. 가격이 비슷한 청소기 대비 아주 조금 저렴한 것이 그나마 장점이었다.
방송에서 백날 성능이 어떻고 가격이 어떻고 이야기해 봐야 실패할 것이 자명했다. 요즘 성능이 안 좋은 청소기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고민을 하던 중에 머리가 아파서 잠시 TV를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예능프로에 은퇴한 농구선수가 게스트로 나와 웃음을 주고 있었다. 운동선수답지 않은 뻣뻣한 몸과 그의 깔끔병이 주된 웃음 포인트였다. 그때 갑자기 번개같이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깔끔하기로 유명한 연예인이 쓰는 청소기라면 어떨까? 심지어 단순한 광고 모델 수준이 아니라 정말 잘 쓴다면?'
지체 없이 기획안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청소광, 깔끔병 연예인과 콜라보를 해서 상품의 신뢰성을 얻자는 것이었다. 판매 전부터 쓰게 하고 솔직한 후기를 종종 남겨주면 그걸 방송에도 활용하고 이왕이면 그 연예인을 출연시키면 좋겠다는 아이디어였다.
그와 더불어 메탈 소재에 외관이며 소음이며 사이버틱한 이미지를 풍기고 약간 로봇을 연상시키는 청소기에 정체성을 하나 더 만들어주었다. 남자들이 뭔가 장난감 다루듯이 거부감 없이 접근할 것 같았다.
'남편이 먼저 찾는 청소기'
나는 이런 아이디어들을 종합해서 바로 메일을 보냈다.
1주일 후 인사팀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면접 결과가 어땠고 기획서가 어땠는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대뜸 연봉과 복리후생 등을 담은 오퍼 레터였다. 지금 연봉 대비 꽤 높은 연봉과 연차 상승까지 담은 제안이었다.
다만 그 조건들이 지금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직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답을 미루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답이 없자 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선배가 다시 전화가 왔다.
"왜 아직 답을 안 했어? 조건이 마음에 안 드니?"
"좀 애매해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연차도 오르고 중책을 맡을 건데 그것도 생각해야지. 같이 일하자!"
선배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또 일주일이 지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그때 면접 때 뵈었던 본부장입니다. 오늘 오후에 바쁘세요?"
"안녕하세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
"제가 회사 앞으로 갈 테니 잠깐만 뵈었으면 합니다"
인사팀 직원도 아니고 본부장이 왜 굳이 회사 앞으로 오는지 의아했다.
"갑자기 놀라셨죠?"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먼 길 하셔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본부장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직 인사팀 제안에 답을 안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연봉 문제도 있겠죠?"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영향은 있습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본부장은 품 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편하게 열어보세요"
봉투를 열어보니 서류가 하나 있었다. 서류에는 일시지급금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인사팀으로부터 현재 연봉과 인센티브 수준을 전달받았습니다. 입사하시게 되면 그 해당 금액을 일시로 드리겠습니다. 아마 책정될 연봉과 그 금액을 합치면 현재 받으시는 전체 수준보다 높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서류에는 꽤 큰 금액이 적혀있었고 입사일에 즉시 지급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인사팀 직원분께서 말씀 주셔도 되는 내용인데 굳이 본부장님께서 이렇게 먼 길 오셔서 송구스럽습니다"
고민의 파도 속에서 간신히 마음을 붙잡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부장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저희가 같은 수준의 회사고 같은 연차의 동료보다 연봉을 아주 높게 받는 것은 회사 방침에도 맞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오퍼하고 거절하시면 포기하려고 했는데요"
그렇지. 그게 일반적인 과정이지.
"사실 실무 테스트라고 말씀드린 내용은 론칭이 임박했던 상품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전달 주신 기획서 내용을 일부 반영해서 어제 론칭 방송을 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잘 나왔어요. 물론 말씀 주신 그런 내용들만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 결과를 보고 꼭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본부장의 말에 내 몸속에서 슈퍼맨의 힘이 꿈틀 했다. 이번에도 너였구나.
"아 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상품이 좋아서 그런 거죠 뭐"
"합류하시게 되면 직급도 한 단계 올릴 계획입니다. 긍정적으로 꼭 생각해 주세요"
그렇게 본부장은 바삐 자리를 떠났다.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제안을 준 회사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이 정도로 내가 평가받는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나는 슈퍼맨이다!
고민 끝에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본부장에게도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경쟁사 제안은 끝이 났지만 내 몸 속에 슈퍼맨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