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24시간이고 홈쇼핑 방송도 1시간 방송 기준 24개가 한계이다. 한 화면에 2개의 방송을 나눠서 송출하는 이상한 방법이 아니라면 어떤 홈쇼핑 회사도 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 말인즉슨 하루에 방송으로 선보일 수 있는 상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한정된 기회를 잡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상품이 홈쇼핑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MD의 안목, QA의 까다로운 요구, 심의팀의 검증, 편성팀의 선택 등 방송 한 시간을 하기 위해서 상품이 통과해야 할 과정은 매우 많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 편성이 된 상품은 어지간하면 어느 정도는 팔릴 것이라고 예상이 되는 소위 말하는 검증된 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게 팔릴까? 싶은 상품들이 편성되기도 한다. PD 입장에서 가장 난감한 경우이다. 고객에게 어필할만한 포인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아도 조금 과장해서 지어내서라도 매력적인 상품과 방송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PD들도 조금만 연차가 쌓이면 이런 상품들이 눈에 보이기에 그런 상품의 방송은 은근슬쩍 맡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팀장이 나에게 무알콜 맥주의 론칭을 맡겼다. 당시 나는 신기한 상품이라 생각하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팀의 선배들은 생각이 달랐다.
"무알콜 맥주를 왜 마셔??? 그거 아예 알코올 0%도 아닐걸??"
"그거 마셔도 운전하면 음주운전이야"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관심이 없을 거고 술 마시는 사람은 이걸 왜 사??"
다들 부정적인 말과 함께 괜히 어려운 방송 맡았다며 나를 격려했다.
그렇게 시작한 1차 회의. MD와 브랜드사를 만나니 조금 더 막막해진 느낌이었다.
홈쇼핑이 처음인 브랜드사는 아무것도 모르니 잘 알려달라는 말만 반복했고 MD는 묵묵히 상품 정보를 나에게 브리핑해주었다.
'이거 망하겠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상황을 보면 볼수록 이건 안 되는 상품이었다.
자꾸 술 이야기가 나오니 술이 마시고 싶어서 혼자 회사 앞 맥주집을 찾았다.
쥐포와 함께 생맥주를 한잔 하며 가게를 둘러보다가 가게 냉장고에 무알콜 맥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장님 여기 무알콜 맥주가 있네요?"
"네 주로 회식이나 뒤풀이 같은 거 하는 단체손님들이 종종 찾아요"
"왜 회식이나 뒤풀이 때 무알콜 맥주를 찾아요??"
"다 같이 술 마시고 건배하는데 그냥 물 잔이나 콜라면 좀 분위기가 그렇대요 허허"
이런 수요가 있다는 것을 현장에 가서 겨우 찾아냈다. 아예 가망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무알콜 맥주 샘플을 두고 머리를 짜내고 있는데 막 출산 휴가에서 복귀한 후배가 맥주를 집어 들었다.
"이거 무알콜 맥주네요!! 반갑다!"
"왜?"
"저 술 없으면 죽는 거 아시잖아요. 임신하고 친구들이며 동기들이며 불러서 노는데 혼자 술 못 마시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겨우 버텼죠"
1)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의 불편한 상황을 방지해 준다
2)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애주가의 구세주다
어떻게 보면 뻔한 소리지만 실제 수요를 확인했으니 이런 수요를 가진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장치들이 필요했다.
마침 대학교 축제 시즌이었고 한 후배로부터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혹시 과 후배들 다 술 잘 마시니? 못 마시는 애들도 있지 않아?"
"그렇죠. 아무래도 이제 갓 성인이 된 신입생들도 있다 보니 그런 경우가 많아요"
"그럼 그 친구들은 어떻게 해? 물 마셔?"
"네 그렇기도 한데 아시다시피 이게 또 좀 취한 분위기 되고 그러면 억지로 주변에서 권하기도 하고 본인도 갑자기 용기 내서 마셔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늘 사고 날까 봐 걱정이죠 뭐"
"내가 무알콜 맥주 협찬해 줄 테니까 술 못 마시는 애들 나눠주면 어떨까?"
"오? 너무 좋은데요?"
"대신 그거 촬영 좀 할게"
그렇게 축제 당일 카메라 감독과 나는 무알콜 맥주를 양껏 들고 학교에 방문했다.
술을 못 마시는 친구들도 무알콜 맥주로 무리 없이 어울리는 모습은 물론 축제의 흥겨움도 카메라에 담았다. 찾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한가득 가져간 무알콜 맥주는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모두 동이 나고 말았다.
대중적이진 않지만 찾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찾을 만한 상황을 많이 보여주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쇼호스트도 의욕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무알콜 맥주를 권유하며 이래저래 쓸만한 영상 자료를 확보해주고 있었다.
특이한 상품을 방송하는데 늘 하던 방식처럼 상품을 진열해 두고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방송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무알콜이긴 하지만 맥주인데!
나는 세트 감독을 찾아갔다.
"감독님. 이번 방송 세트를 클럽처럼 꾸며주세요"
"클럽이요?? 클럽 무대처럼요? 농담이죠?"
"아뇨 진짜 그렇게 가려고요. 그 춤추고 하는 그런 공간 있지 않나요? 저는 클럽을 안 가봐서.."
"저도 그런데.."
"..."
세트 감독은 원하는 세트를 만들어주겠지만 회사에서 문제 삼으면 본인은 책임을 지지 못한다며 난감해했다.
그리고 섭외 담당자를 찾아갔다.
"이번 방송 배경에 클럽 남녀 컨셉의 모델들 4명만 섭외를 좀 부탁드립니다. 말 그대로 클럽에서 노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어요"
"네?? 팀장님이랑 이야기되신 거예요?"
"네(니오)"
그렇게 홈쇼핑에서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송 기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문제는 꼭 방송 당일날 터진다. 이른 아침 쇼호스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다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졌는데... 팔이 부러졌어요.."
쇼호스트의 안위도 걱정되었지만 방송도 걱정되었다. 한 달 넘게 컨셉을 공유하고 호흡을 맞추며 방송을 준비했는데.. 미뤄야 하나?
회사에서는 대체 쇼호스트를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나는 급히 지난 준비 과정을 쏟아내듯이 쇼호스트에게 전달했다. 갑작스럽게 흔하지도 않은 상품을 책임지고 판매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인지 쇼호스트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렸고 나 역시 긴장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또 하나 부담을 주는 일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편성팀입니다. 오늘 방송 매출이 저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서 녹화방송 하나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방송 초중반 매출이 저조하면 바로 넘겨주세요"
매출이 저조할 가능성이 큰 상품을 애초에 왜 편성을 했냐, 방송하는 사람 시작도 전에 기를 죽여도 유분수지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 한 걸 간신히 참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걱정 속에 방송은 시작되었고 번쩍이는 조명과 춤추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쇼호스트의 우렁찬 멘트가 tv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맥주캔을 들고 있는데요, 혹시 술을 마시면서 방송을 하나 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근데 이건 진짜 술이 아닙니다! 저희가 이렇게 춤을 추며 술을 마시는 것 같지만 이건 무알콜 맥주예요! 홈쇼핑에서 이런 장면 상상이나 해보셨을까요?"
쉴 새 없는 쇼호스트들의 멘트를 체크하며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영상을 스탠바이 시키고 실시간 주문 현황을 보며 그때그때 적절한 자막을 내보냈다.
처음 보는 상품에 고객들의 질문이 쏟아졌고 고객대응팀과 MD, 업체가 덩달아 바빠졌다. 첫 설명이 끝나고 미리 준비했던 대학 죽체 영상이 나갈 때쯤 주문이 말도 안 되게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PD님! 준비한 수량이 거의 안 남았어요!"
중간중간 남은 수량을 체크하던 MD가 방송 시작 25분 만에 남은 수량이 거의 없다는 연락을 해왔다.
쇼호스트는 연신 매진 임박을 목이 터져라 외쳤고 30분 만에 준비한 수량이 모두 팔려 방송은 끝이 나고 말았다.
대기하고 있던 편성팀 직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잘 팔아주셨네요 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사라졌다.
MD와 브랜드사 직원은 도저히 이렇게 헤어질 수 없다며 회사 앞 맥주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솔직히 저도 매진은 예상 못했어요. 목표치만 하면 좋겠다 생각했죠"
"저도 오늘 예상보다 많이 팔려서 오프라인 영업팀이랑도 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물량 좀 빼와야 해요. 하하하"
흥분한 MD와 브랜드사 직원은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고 나는 무알콜 맥주를 하나 시켰다.
"왜 무알콜 맥주를 드세요?"
"맨정신으로 건배를 하고 싶어서요"
오늘도 여전한 슈퍼맨을 위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