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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Aug 08. 2024

5화 직장인들 앞에서 발표의 신이 되다

배우로서 경험한 즐거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100명 이상의 대규모 채용으로 이슈가 되기도 한 통신사 인턴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3달간 진행되는 인턴 과정은 1달의 연수와 2달의 현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지막 최종 평가가 있었다.


멋모르고 시작한 인턴 생활은 너무 재미있었다. 이천에 위치한 통신사의 으리으리한 신입 연수원에서 각 팀으로 나뉜 또래들과 함께 지내며 강의를 듣고 연수원의 맛난 식사를 하며 밤에는 늦도록 운동이며 모임이며 사교활동 등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놀고먹을 수는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도 자선 사업을 하는 것 아니었을 테니 결과가 필요했다. 그래서 회사가 내놓은 과제는 연수기간 중 현재 통신사에서 밀고 있는 캠페인을 대중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제시할 것 그리고 마지막 평가 날 통신사에서 운영하는 포털사이트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 발표하는 것이었다.


회사는 인턴들이 그냥 대충 하고 수료하는 일을 막기 위해 기막힌 리워드를 내걸었다. 바로 우수 팀에 한해 공채 서류 및 필기 전형을 면제해 준다는 것이었다. 국내 대표적인 대기업 중 한 곳에 서류와 필기시험을 프리패스할 수 있다니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내가 속한 팀은 유난히 다들 가까웠다. 식사 시간마다 모여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업무시간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며 방에서 늦도록 친목을 다졌다. 하지만 과제 이야기가 나올 때만큼은 서로 불꽃이 튀겼다. 각자 쌓아온 경험과 전공이 다르기에 캠페인을 홍보하는 방법에 대해 이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런데 그게 데이터적으로 결과가 나와야.."

"카피에 문구를 좀 더해볼까?"

"재무 측면에서 비용 대비 효과도 고려를.."


각자 어설프게나마 대학에서 배운 지식들을 내세우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런데 발표를 3일 앞둔 어느 날 팀원 중 한 명이 큰 일을 해냈다.


"어제 인사팀 과장님이랑 담배 피우면서 우연히 들었는데 이번에 그 캠페인을 CF로 제작해서 홍보할 거라던데?"


실제 회사가 하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우리는 팀원이 빼돌린(?) 정보를 바탕으로 논의하던 모든 방법론들을 접고 어떻게 영상으로 캠페인을 홍보할 것인가에 몰두했다.


다음날 저녁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 팀이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모여서 뭔가 찍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자 다른 두 팀이 체육관에서, 회의실에서 또 뭔가를 찍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팀원이 알아낸 정보는 우리만의 정보가 아니었다. 어느샌가 모든 인턴들에게 공유가 된 것이다.

이제 모두 영상을 만들기로 한 이상 그 영상을 얼마나 차별성 있게 만드냐가 중요해졌다.


이제는 어떻게 영상을 기획하고 제작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다른 팀들을 촬영 현장을 보니 플래시몹, 인터뷰 형식 등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우리에게는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밤늦게까지 회의를 여러 차례 하다 보니 모두가 피곤해졌다. 특히 잠에 예민한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 와중에 잠꼬대처럼 한마디를 해버렸다.


"그냥... 뮤직비디오를 만들자"


시장터처럼 시끄럽던 회의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그냥 한번 멘트 얹어봤다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심각했다.


"나는 좋은 것 같은데..?"


침묵을 깨고 팀장이 말했다.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들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졸린 데다가 준비하고 말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우리 지금 지겹게 듣고 있는 노래 있잖아.. 빅뱅 '하루하루' 거기 맞춰서 하나 만들어보면 어떨까? 다들 좀 밝고 명랑한 영상 만드는 것 같으니까 우리는 좀 어둡고 스타일리시한 느낌으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는 매일같이 지겹게 빅뱅의 '하루하루'를 들었다. 맞춰서 춤을 추기도 하고 술에 취해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누가 지디를 맡네, 태양을 맡네 헛소리까지 난무하던 시기였다.


하도 듣다 보니 영상을 만들던 PD로서 뭔가 그 음악에 영상을 만들어본다는 상상을 해봤던 터라 일단 지르고 봤다.


그런데 대책 없이 지른 것에 비해 다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망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빅뱅스럽고 스타일리시한 영상이 나오려면 스토리가 밝고 그러면 안 되겠다. 싸울까?"

"캠페인인데 싸우면 좀 그렇지 않을까? 차라리 킬러가 나오는 건 어때?"


대충 이렇게 논의가 마무리되고 최종 시나리오는 내가 맡게 되었다.


우리는 다음날 밤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비주얼이 좋은 남녀 팀원이 연인이자 서로에게 비밀인 킬러 역할을 맡고 몇몇 팀원이 조연과 엑스트라를 자처했다.


나는 서로 킬러임을 비밀로 했지만 통신 주파수 혼선으로 서로의 정체가 탄로 나서 마지막에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는 다소 황당한 시나리오를 급하게 썼지만 캠페인과는 최대한 연계시키는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나는 홀로 편집을 시작했고 이틀 밤샘 끝에 팀원 전원이 오케이 한 역작(?)이 탄생했다.


연수원 종료날 대망의 첫 발표. 첫 팀부터 귀여운 율동이 가득한 영상을 선보였고 플래시몹, 일상 상황극 캠페인과 카피를 접목한 영상들이 끝나고 우리의 차례가 왔다.


익숙한 노래의 전주가 나오자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팀원들의 연기도 나쁘지 않았고 일부러 밤에만 찍은 보람이 있게 영상도 분위기가 있었다. 마지막 주인공들이 마주 보며 서서히 나오는 캠페인 문구도 괜히 멋져 보였다. 영상이 끝나고 팀장의 간단한 발표가 이어졌다.


결과는 15팀 중 간발의 차로 2등.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제 남은 건 인턴 기간 마지막 평가날 발표.

우리와 3등 팀과의 점수차이가 꽤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1등 팀의 굳히기냐 우리의 뒤집기냐만 남아있었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 현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모여 최종 발표에 대해 회의를 이어갔다.

서로 아이디어가 바닥까지 드러나버린 어느 지친 주말. 우리는 이 회사 꼭 입사지원을 해야 되냐, 그냥 포기하고 술 마시러 가자는 농담을 하며 카페에 널브러져 있었다.


'참 가지각색의 대학에서 가지각색의 전공을 공부하며 가지가색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구나'


그래도 정이 많이 쌓인 팀원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포털 사이트가 각각에게 맞는 정보를 보여주는 건 어떨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아무래도 영화나 영상 같은데  관심이 많으니까 그런 뉴스나 글이 메인에 바로 떠주면 좋거든. 근데 넌 전혀 아니잖아"

"그렇지. 나는 뭐 기업들 오너 소식 이런데 관심이 많지"

"그러니까 검색 결과들을 종합해서 개인마다 관심 있어하는 걸 바로 보여주는 거야. 내가 검색할 필요도 없이"


지금이야 유튜브, 넷플릭스 등 너무 당연한 서비스이지만 당시 개인 맞춤형 서비스라는 것이 보편화되지는 않은 시절이었다. 다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런 건 어때? 내가 유기견 뉴스를 클릭하면 광고 배너에 유기견 후원 광고가 뜨는 거야!"

"아예 내가 보고 싶은 섹션만 메인에 나오게 할 수 있으면 어떨까? 나는 정치는 아예 모르겠고 스포츠가 더 다양하게 보이면 좋겠거든!"


갑자기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개인 맞춤형 서비스로 주제를 잡았다.

그렇게 발표를 순조롭게 준비하던 중 팀장이 나를 불렀다.


"이번 발표는 너한테 좀 부탁할게"

"왜? 저번에도 발표 잘했잖아"

"사실 개인화 서비스에 대해서 구현 가능성도 잘 모르겠고 나는 와닿지가 않는데.. 다들 좋아하니까 하긴 해야겠고. 그런데 내가 설득이 안되는데 발표를 하는 게 맞나 해서"


그렇게 가장 중요한 발표를 내가 맡게 되었다. 준비를 하는데 자꾸 더듬거리고 말이 꼬이는 등 발표는 엉망이었다. 발표 당일 500명에 가까운 회사 인턴과 임직원들도 참석할 예정이고 이 발표에 따라서 우리가 1등을 할 수 있냐 없냐가 걸렸기 때문에 그 중압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PPT의 달인인 팀원이 멋지게 발표자료를 만들어줬고 다들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지만 내 발표 능력은 나조차도 믿을 수 없었다.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구현 기술이나 재정적인 이득 같은 부분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말이 헛 나오고 내 말 같지가 않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집에서 혼자 온갖 명언이나 좋은 케이스들을 찾아 발표에 붙여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발표는 더 조악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 순간 최근 내가 영화 출연 등으로 고생하던 경험이 생각났다. 나 같이 정보가 없는 사람한테 연기나 영화 정보, 오디션 정보 같은 것들이 포털에 정리되어서 보이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발표를 다시 구성하기 시작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들어가니 훨씬 발표가 수월했다. 게다가 흔치 않은 경험이니 청중들의 호기심도 자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망의 발표 당일. 1등 팀의 흠잡을 데 없는 발표가 끝나고 하필 그다음 우리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니 500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선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압도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왠지 즐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이 꺼지고 우리 팀의 발표 자료가 화면에 띄워졌다. 말을 시작하려는데 마이크를 든 손에서 슈퍼맨의 힘이 느껴졌다. 일말의 긴장마저 사라졌다.


"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끼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영화에 출연을 하고 그 영화가 개봉을 하고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기적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근본도 없고 연줄도 없는 제가 어떠 오디션이 있는지 영화계에 어떤 소식이 있는지 알기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내 이야기를 하니 말이 쉽게 나왔다. 중간중간에도 내가 정보를 찾기 위해 별별 일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때의 진한 아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개인의 열정을 포털이 도와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서비스보다 유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발표가 끝나고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위원 한 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혹시 이 내용으로 예전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연습은 했지만 실제 발표는 처음입니다"

"흠.. 내용의 실현 가능성이나 이런 건 당연히 프로페셔널하지 않지만 마치 여러 군데서 발표를 한 것처럼 발표자의 스킬은 아주 완벽했습니다. 완급조절이며 내용 숙지며 본인의 이야기로 흥미를 더한 것 등등이요"


그런 무대에서 타인에게 '완벽'이라는 말을 들은 게 그때가 처음이자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없는 경험이었다.


심사위원의 평을 들은 우리 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사회를 담당하던 인사팀 대리도 괜히 몇 마디 거들며 우리의 분위기를 띄워주었다. 좋은 예감을 한 듯 무대에서 내려온 나를 모두가 안아줬다.


결과는 역전 1등. 우리 팀 전원은 회사의 서류와 필기시험을 면제받는 혜택을 거머쥐었다.

나는 정말 슈퍼맨이었다.


안타깝게도 슈퍼맨이 잠시 휴가를 갔는지 해당 회사 서류와 필기시험을 면제받았음에도 나는 1차 면접에서 광속탈락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 무대 위에서의 기분 좋은 긴장감, 발표가 끝난 후 모두가 나를 대견하게 쳐다보던 그 눈빛, 인턴십 종료 만찬에서 나를 스타처럼 대우해 주던 많은 인턴들 그 모든 것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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