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연극영화과가 있지는 않았지만 음대 심화 과정으로 연기 강의가 있었다. 나는 대뜸 수강 신청을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무대에서 몸을 푸는 학생, 자리에서 목을 푸는 학생 등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지 않은 풍경들이 펼쳐졌고 외로이 앉아 나의 돌발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신방과 학생이 있네요? 누구죠?"
출석을 부르는 순간부터 나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는데 저도 연기에 대해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두 시간짜리 수업의 한 시간은 늘 몸을 푸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앞 구르기 뒷구르기 물구나무서기 등은 물론이고 원숭이 흉내내기 같은 정말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적응이 안 되는 것도 있었다.
한 시간은 유명 연극이나 영화의 대사들을 따라 하고 교수가 피드백을 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무런 기초 없이 연기에 뛰어든 나에게는 정말 피와 살이 되는 강의였다.
그렇게 조금씩 실력이 늘어간다는 착각이 들자 좀 더 큰 물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지르는 게 해결책이라는 생각에 나는 분수에도 맞지 않는 오디션이라는 것을 마구잡이로 신청하기 시작했다.
"시작해 보세요"
"내가 먼저 시작할 테니까 너는 그냥 잘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돼. 이걸 이렇게.."
"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 보세요"
"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어두컴컴한 무대에서 혼자 대사를 하고 어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마디 하다가 쫓겨나는 일이 대다수였다. 역시 아무나 배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또다시 오디션에 참가한 어느 날. 웬일로 준비해 온 연기와 즉석 연기까지 할 기회를 받고 나름 혼신의 연기를 한 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방금 오디션장에서 만났던 감독입니다. 잠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됐다!! 이건 감독이 도저히 놓치기 싫은 배우를 잡는 그림이 아닌가??!!
부푼 가슴을 품고 감독이 보자고 하는 카페로 갔다.
"연기 전공을 안 하셨죠?"
"네.. 그냥 이래저래 해보고 있습니다"
"큰 영화에 나오기에는 솔직히 좀 많이 부족해요. 오늘 오디션 본 배역에도 부적합합니다"
그럼 왜 보자고 한 거지... 확인 사살인가.
"대신 제가 따로 기획하고 있는 영화에 왠지 이미지가 딱이어서 그런데 출연하실 생각이 있을까요?
"어떤.. 영화인가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좀 내용이 강한 영화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제안드릴 배역은 게이 역할이고요"
일반적인 연기를 해도 따라갈까 말까 한데 게이 역할이라니.. 순간 감독에 대한 신뢰부터 이게 혹시 그 유명한 사기는 아닐까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제안을 해주는 게 어딘가. 나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 초짜 배우인데.
"네 하겠습니다"
"남양주에 세트장이 있고 3달 정도 촬영을 할 거예요. 매일 오실 필요는 없고 씬 찍을 때마다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덜컥 캐스팅이 되고 며칠 뒤 대본을 받았다. 감독의 개인 욕심이 많이 들어갔는지 정말 수위가 높았다. 라이트한 대중들이 보기에 불편할 수도 있을만한 내용들이었다.
일단 긍정적인 건 분량이 꽤 있다는 것과 내가 나오는 씬들이 영화의 핵심이자 강렬한 장면들이라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잘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건 비슷한 배역이 있는 영화들을 보고 또 보는 것. 그리고 연습 또 연습이었다.
절친들은 내가 집에서 이상한 영화를 보고 이상한 대사를 하기 시작했다며 갑자기 우리 집 방문을 꺼려했다. 가끔 내가 터치를 하면 놀라며 물러서기도 했다. 이런 놈들이 친구라니 울분을 표하면 그제야 응원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대형 스케일은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도 너무 많고 조명은 눈이 멀 정도로 밝았다. 다행히 촬영은 착착 진행이 되었고 걱정과 달리 순조롭다고 생각했는데 꼭 이럴 때 일이 터진다.
"한 장면을 꼭 추가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이죠?"
"흐름상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들어가야 맞을 것 같아요"
"아......"
나름 스크린 데뷔작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처음으로 못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게... 저는 해본 적도 없고.. 또 노출도 신경 쓰이고.."
"노출은 막을 거고 연기만 잘해주면 되니까 한번 해봅시다"
"여성 스태프분들도 많은데 제가 벗으면 그게 좀..."
한 시간가량 감독과 논쟁이 이어졌고 결국 장면을 찍되 최대한 짧게 찍고 촬영장에 감독만 남고 스태프들은 다 빠지는 걸로 협의가 되었다.
결국 그 장면은 감독이 박수를 칠 만큼 잘 나왔고 나는 한동안 멍하게 세트장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일부 후시 녹음까지 마친 후 나는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1년 넘게 아무 소식이 없어서 창고에 처박혀있나 보다 했는데 갑자기 감독의 전화가 왔다.
"생각보다 영화가 잘 나와서 해외 영화제들에 출품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특히 게이 역할 배우가 강렬했다는 평도 많았고요. 그래서 다행히 국내 상영 결정이 되었는데 곧 무대 인사가 있어요"
해외 영화제는 뭐고 무대 인사는 또 뭐지?? 감독이 알려준 영화 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정말 국내 영화관들에 떡하니 노출이 되고 있었다.
감독이 알려준 날짜에 강남에 있는 영화관으로 가서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 몇몇 배우와 함께 무대 인사를 진행했다. 몇몇 관객들이 나에게 와서 대화도 나눴다. 개인 SNS로 연락도 많이 받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는 학생이 학교 축제부터 시작해서 상업영화 무대인사까지 오르다니. 아마 내 인생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슈퍼맨의 힘은 여전히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