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방송에 PD가 출연해 상품을 팔다니!

by 지크

홈쇼핑의 꽃이 쇼핑호스트인 이유는 상품을 구매하도록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최전선에 있기 때문이다. TV 화면 너머에 있는 시청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한 시간 동안 대본도 없이 쉴 새 없이 멘트하고, 상품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쇼핑호스트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시에 저런 전문가들도 한 번씩 방송사고를 내는데 홈쇼핑 생방송에 출연을 하게 되면 얼마나 부담이 될까 하는 허튼 상상도 많이 해보았다.


얼마 전 후배 PD가 모바일 방송을 통해 삼겹살을 판매하게 되었다. 방송 준비를 하면서 유독 머리를 싸매고 있기에 이유를 물어봤더니 하필 불금에 연휴 전날 밤 방송이라 쇼핑 호스트 섭외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힘으로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어서 위로의 말만 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음 날 그 후배가 자리로 오더니 본인이 굉장히 재미있는 방송을 기획했다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본인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어차피 쇼핑호스트 섭외가 어려우니 전문 방송인이 아닌 PD들이 출연해서 상품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라며 칭찬과 함께 기획서를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출연진에 떡하니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펄쩍 뛰며 나는 죽어도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유독 식품을 많이 방송해본 PD라는 이유로 팀장님마저 오케이를 했고 결국 출연이 확정되어버렸다.

후배는 모바일 방송이고 연휴 전날 밤이라 시청자들이 많이 없을 거라며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지만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생방송에 출연을 해서 게다가 상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깨를 무겁게 했다.


방송 포맷을 듣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MD와 협력사와의 회의를 마치고 나는 상품 연구에 들어갔다. 방송의 흐름은 물론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상품을 매력적으로 포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스토리를 만들어 갔다.

외식 가격과의 비교, 독일산 돼지의 우수함, 판매 브랜드의 신뢰성, 참신한 맛 표현, 삼겹살 활용 요리 등을 찾아보고 정리하고 멘트화 하고 그걸 또 연습을 하다 보니 매일 자정이 훌쩍 넘어갔다. 10년이 넘게 홈쇼핑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쇼핑호스트는 방송 준비를 어떻게 할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한 시간을 쉴 새 없이, 그리고 재미있는 멘트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외면하고 싶었던 방송 당일, 카메라 앞에 앉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으면서도 방송사고가 걱정되는, 나도 내 심정을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며칠 동안 방송 준비와 부담감 탓에 잠을 설치고 맛있게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공복 상태던 나는 그렇게 거의 무의식의 상태가 되었다. 결국 PD의 큐사인이 떨어지고 거짓말같이 방송이 시작되었다.


불금에 쇼핑호스트 섭외가 힘들어서 PD가 그냥 나와버렸다. 말재주가 없어서 상품을 솔직하게 리뷰해보겠다는, 준비한 오프닝 멘트와 함께 잘 구워진 삼겹살을 입속에 마구 넣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누가 봐도 방송용 비주얼이 아닌) 사람의 등장에 채팅창이 시작부터 바빠졌고 덕분에 나는 짜임새 있는 방송과 멘트 대신 시청자들과 소통을 하며 방송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다행히 삼겹살이라는 상품 자체도 설명 후 먹는 것만 반복하면 되어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30분이 지났고 방송사고는 전혀 없었으며 PD는 연신 지금 엄청 잘 나가고 있다며 환호성을 보냈다. 긴장이 풀리고 적응이 되면서 멘트마저 더 잘 나오는 게 아닌가! '역시 10년의 경험은 무시하지 못하는군 아니면 방송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나?' 등의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스멀스멀 피어날 즈음 결국 일이 터졌다.


방송 시작부터 의욕적으로 삼겹살을 먹은 탓에 40분 정도 지나자 배가 꽉 차 버린 것이었다. 목 끝까지 삼겹살이 차 버린 탓에 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놓아버렸다. '이래서 쇼핑호스트들이 식품 방송을 진행할 때 맛 표현도 길게 하고 상황극도 많이 하면서 페이스 조절을 하는 거였구나'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결국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대하는 시청자들을 두고 생방송 도중 출연자가 배가 불러 도저히 못 먹겠다고 포기 선언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아예 상을 물리고 힘겨워하는 나의 모습을 다행히 시청자들은 재미있어했고 연출하던 PD와 스태프들이 들어와 먹는 모습을 계속 보여줌으로써 방송은 큰 문제없이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방송이 끝나고 정말 1시간 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정신이 없었음을 느꼈다. 그렇게 'PD가 진행한 홈쇼핑 방송'이라는 작은 해프닝(?)은 끝이 났고 우연의 일치로 그 다음 날 방송은 MD가 출연해서 의류를 판매했다. 큰 매출이 기대되고 정제된 방송 이어야 하는 TV 방송과 더불어 이렇게 모바일 전용 방송이 홈쇼핑에 많이 늘어남에 따라 기존 홈쇼핑 방송에서 보여주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이 많이 보여지고 있다. 다시 출연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홈쇼핑 트렌드 변화에 편승해 재미있는 추억을 하나 만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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