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카드를 품고 다니는 직장인의 심정
홈쇼핑 PD들마다 방송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각자만의 스타일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회사 창립 이래 가장 빠르게 입봉을 한 나는 부족한 경험을 메우기 위해 협력사와 MD 그리고 출연진의 의견을 최대한 듣고 방송에 어떻게든 반영하려고 했는데 자연스레 그것이 나의 방송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매출을 떠나서 관계자들의 방송 만족도만큼은 높았고 그것이 운 좋게 평판에 반영이 되면서 회사에서 조금씩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쌓인 좋은 평판이 내 귀에 들어올 무렵에도 아직 부족하다며 겸손한 척 하기는 매우 쉬웠지만 그 이면에서 나는 내가 회사의 핵심 인재 중 하나라는 자아도취에 빠져버렸다.
마치 영화처럼, 인생의 꼭짓점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인생 최악의 실수가 나왔다.
눈 감고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전담이었던 고가의 가전 브랜드 방송을 부담 없이 준비하고 방송마저 대박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퇴근한 다음날이었다.
출근을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게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회사 이메일을 열었고 심의팀에서 보낸, 방송 관련 이슈라는 메일을 발견했다.
홈쇼핑 PD로서 자주 받는, 어차피 작디작은 오타나 호스트의 멘트 실수에 관한 메일이겠거니, 그냥 다음에 더 조심하겠다는 이야기만 하면 되는 그런 내용이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메일의 내용은 내 기대와 너무나도 달랐다. 늘 하던 방송이라는 안이함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교만함이 가려버린 내 눈으로 대충 확인한, 방송 중 고객들에게 보이는 혜택 자막에 치명적인 오타가 여러 군데 있었고 그 오타를 근거로 수많은 고객들이 원래는 없었을 혜택을 요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의 실수로 인해 고객들에게 보상 시 회사 피해액이 무려 수천만 원에 달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방송 사고에 회사는 뒤집어졌고 나는 몇 주간 PD팀과 경영진단팀, 심의팀 등을 오가며 문책을 당했다. PD 업무의 기본인 자막 확인을 그렇게도 대충 했다는 사실에 모두들 아연실색했고 변명거리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들은 질책성 말보다, 징계위원회나 감봉 가능성 등의 무시무시한 단어들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어렵게 쌓아온 나의 평판과 잠시나마 하늘 끝까지 쌓아 올린 자존심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었다. 회사를 떠들썩하게 한 사고를 친 장본인으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계속 보는 것조차 너무 힘이 들었다.
유난히도 고객들의 컴플레인에는 예민한 홈쇼핑 회사의 특성상 결국 나의 실수는 고스란히 회사의 피해가 되어버렸다. 고객들에게 보상이 끝나고 남은 건 나에 대한 처분이었고 임원들 회의에서도 이번 사고로 인해 고성이 오고 갔다는 이야기 등을 들으며 하루하루 부서진 마음을 움켜잡고 이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성격 탓에 태어나서 큰 사고를 친 적도 별로 없고 이렇게 남에게 크게 피해를 입힌 적도 없는데 인생 최악의 실수를 하필 회사에서 저질러버렸다는 생각에 한동안 나 자신을 괴롭히며 퇴근 후 불 꺼진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공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차라리 이직을 해서 이 상황으로부터 도피해버릴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도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사업부장이 나를 호출했다. 걸어가는 동안 사무실 모두의 시선은 그들의 책상과 휴대폰과 노트북에 가 있었지만 신경은 나에게, 그리고 잠시 후 나올 나에 대한 처분에 쏠려 있음이 느껴졌다.
공기마저 무거웠던 회의실에서 가벼운 질책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지만 처음 한 실수라는 점, 지금까지 비교적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던 점 등이 고려되어 경위서 한 장을 쓰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한 달 넘게 나를 괴롭히던, 오롯이 나의 실수로 시작된 악몽과 같은 시간은 끝이 났다.
이미 4년 전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종종 후배들에게 나의 실수담을 이야기한다. 후배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스스로 내 실수를 끊임없이 들춰내며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회사 생활은 축구 시합과 비슷하다. 한 번의 심한 반칙은 대개 옐로카드로 끝나듯이 큰 실수도 한 번은 실수겠거니 넘어간다. 하지만 두 번의 심한 반칙은 레드카드와 함께 퇴장을 당하듯 회사에서 두 번의 큰 실수는 그냥 넘어가지도 않을뿐더러 그 사람의 능력이 원래 그 정도라는 낙인을 찍는다.
어찌 되었건 나는 소중한 한 번의 기회를 너무나 어이없게 날려버렸다. 가끔은 그것이 너무 아쉽기는 하지만 옐로카드를 품고 다니는 홈쇼핑 PD로서 이제는 한번 더 확인하고 조금 더 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업계를 떠나기 전까지 스스로의 실수로 레드카드는 받지 않겠다며 또 다짐하는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