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의 장점 중 하나는 방송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PD들 역시 더울 때 시원하고 추울 때 따뜻한 스튜디오를 벗어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스튜디오에서만 방송을 하다 보니 일상이 조금은 단조로운 단점도 있다.
몹시도 더웠던 올해 8월의 일이다. 복숭아 방송을 배정받았는데 결제를 하면 상품을 한 번에 받아보는 일반적인 홈쇼핑 상품과 달리 특이하게 선결제 후 복숭아 종류별로 가장 맛있는 제철에 맞춰 정기적으로 배송받아보는 상품이었다. 단지 특이한 컨셉이라고 생각했던 이 상품은 회의를 시작하고 나서야 내게 큰 난관에 봉착했음을 알려주었다.
복숭아를 추후에 가장 맛있을 때인 제철에 보내준다는 컨셉은 좋았지만 결정적으로 방송 때는 보여줄 복숭아가 하나도 없다는 큰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객들에게 제철에 배송될 복숭아는 지금 나무에 매달려 익어가고 있으니 방송 때 스튜디오에서 보여줄 복숭아가 없다는 것이었다.
잘 익은 복숭아를 보여주고 꿀 같은 그 과육을 베어 먹으며 고객을 유혹해도 모자랄 판인데 방송에 보여줄 복숭아가 하나도 없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지금 수확되는 복숭아를 추후 고객들에게 보낼 복숭아인 것처럼 방송을 하면 어떠냐는 조심스러운 아이디어도 나왔다. 어차피 외관상으로 큰 차이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방송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냥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도 어찌 되었건 그건 고객들을 기만하는 행위였고 혹여나 고객들이 한두 달 뒤 제철이라던 복숭아가 지금 왜 있냐고 클레임을 걸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협력사 직원분에게 복숭아 농원이 어딘지 여쭤보니 김천이라며 그건 왜 궁금해하지 하는 표정이 돌아왔다. 이제 스스로 무덤을 팔 차례.
"그러면 차라리 제가 당일날 김천 복숭아 농원에서 방송을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잘 익어가고 있는 복숭아가 곧 고객님들 댁으로 찾아간다 컨셉으로요. 현장감도 살릴 수 있고"
직접 찾아가는 방송을 하겠다니 협력사 직원분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PD님 힘드실 텐데, 바쁘실 텐데 등의 정말 예의상 멘트들이 나온 뒤 바로 방송 포맷이 확정되었다(사실 회의실을 나서면서 후회했다. 이 더운 날 그 먼 김천까지 가서 방송을 해야 하다니)
이왕 하겠다고 했으니 준비는 열심히 해야겠는데 기술적인 문제가 하나 생겼다. 생방송 중 양념처럼 가끔 영상 통화 등을 활용해서 현장의 모습을 보여준 적은 종종 있었지만 창사 이래 그렇게 먼 곳에서 1시간 방송을 통으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방송 품질에 대한 우려가 나온 것이었다.
결국 리허설을 위해 미리 김천을 방문했고 농민분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 방송 테스트 및 무대 등을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내게도 그렇게 먼 곳에서 장시간 깨끗한 화면이 끊김 없이 연결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시골이라고 생각했던 김천이 너무 깔끔하고 좋아서 깜짝 놀랐다. 혁신도시의 위엄이다)
이제 쇼핑호스트를 설득할 차례. 조심스레 바람 쐴 겸 멀리 다녀오자고 했더니 흥미를 보이던 호스트가 김천을 간다고 얘기하니 펄쩍 뛴다. 왜 자꾸 본인을 괴롭히냐는 뼈 있는 농담도 던졌다(하필 예전 글에 나왔던 셀카로 방송했던 그 호스트)
대망의 방송 당일. PD 둘과 호스트, MD로 꾸려진 방송 팀이 새벽같이 김천으로 향했다. 농민분들은 저번에 한번 본 PD라고 더 친절하게 맞아주셨고 서울 아가씨가 너무 예쁘게 생겼다며 호스트를 격려했다.
8월의 뙤약볕과 전날 온 비로 인해 복숭아 농원은 유독 더웠고 방송 준비만 했는데도 땀이 비 오듯이 왔다. 호스트는 연신 화장을 고치고 나는 농민분들이 주시는 시원한 커피와 아이스크림으로 더위와 싸우고 있었다.
유난히 하늘과 복숭아나무가 예쁘게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잠깐의 리허설 후 바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복숭아나무들 사이에서 호스트가 등장하자 시작부터 고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스튜디오 아니어서 신기하다, 대체 어디냐, 하늘이 너무 예쁘다, 날씨가 너무 좋아 보인다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호스트는 작전대로 제철 복숭아가 맛있게 익어가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직접 농원에 나왔음을 강조하며 나무에 열려있는 복숭아를 수시로 보여주며 향을 맡고 감탄사는 내뱉었다. 우연히 섭외된, 유난히 수줍음이 많던, 농민 한 분은 올해 복숭아 농사 상황, 맛있는 복숭아를 고르는 법 등을 알려주며 얼굴이 빨개졌다. 농민분들이 친구가 TV 나온다며 카메라 뒤에서 난리 난 건 보너스였다.
무사히 방송은 끝났고 매출은 기대 이상이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농민분들이 내어오신 시원한 콩국수를 한 입 먹고 나니 정신없는 방송이 끝이 났음이 실감이 났다.
농민분들은 멀리 와서 고생했다며 등을 다독였고 MD 또한 심심할 수 있었던 방송을 재미있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홈쇼핑 PD로서 늘 부조정실,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가끔 현장의 생동감과 즐거움을 잊고 살 때가 있다. 이런 방송이 많아지면야 PD도 MD도 협력사도 힘들겠지만 홈쇼핑 고질적인 문제인 정적인 방송 이미지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모두가 곤히 잠든 기차 안에서 해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