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홈쇼핑 방송을 진행하면서 매력 없는 상품을 터무니없는 가격 조건으로 방송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방송 준비 때부터 갸우뚱했는데 방송을 시작하고 아니나 다를까, 부진한 매출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다 보면 나도 사람인지라 MD와 협력사에게 화가 날 때가 있다. 서로의 전문 영역이 다른지라 면전에서 상품의 매력 없음과 가격 조건의 부실함을 탓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나마 매출 부진의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릴 때가 많다. 또 그런 상품이 의외로 좋은 매출을 기록하면 나의 연출력과 진행을 스스로 칭찬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반복되다 보면 팔리지 않을 상품을 순전히 PD의 방송 연출 역량으로 팔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인이 협력사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식으로 거만하게 말하는 PD들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부끄럽지만 늘 방송이 좋았다고, 덕분이라고 말해주는 협력사 직원분들의 말에 취해 저런 망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나의 이런 건방진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다소 이르게 할 수 있었다.
보통 생방송이 끝나면 그 즉시 PD, MD, 호스트 그리고 협력사가 모여서 리뷰 회의를 한다. 대단한 내용이 오가거나 하는 건 아니고 방송에 대한 기억이 가장 생생할 때 방송의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을 간단히 공유하고 헤어지는 것이기에 방송을 진행한 스튜디오 앞에서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요한 방송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호스트와 방송 전략을 좀 더 논의하기 위해 스튜디오 앞을 거쳐 호스트 대기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스튜디오 앞을 어두운 표정의 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만 걸음을 멈춰버렸다.
"아 진짜 PD는 방송이 이따위로 하면 어쩌자는 거야. 하.. 매출 올라가고 있는데 거기서 영상을 왜 집어넣어 답답하네 진짜"
"하.. 그러게요.. 제가 광고타임에는 꼭 오늘 혜택 강조해 달라고 했는데.. 다음번에 다른 PD님 요청드려볼게요"
아마 그분들은 방금 방송을 끝낸 MD와 협력사 직원들일 테고 어쨌든 PD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스튜디오 옆 정수기에서 괜히 물을 연거푸 마시며 리뷰 회의를 기다렸다.
잠시 후 PD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나는 더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방송은 참 좋았는데 상품이 이래 가지고 원. 죄송합니다"
"PD님 방송 템포 빠르고 좋더라고요~, 저도 하나 살까 했어요"
방금 전의 어두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MD와 협력사 직원분들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PD의 노고를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하기 쉽지 않고 어떻게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나는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방송 진행을 원망하던 MD의 말투 때문도,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협력사 직원분들 때문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으쓱해하는 PD의 모습에서 나의 평소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하는 인사치레였지만 늘 방송이 좋았다는 이야기만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진짜 모든 방송이 잘 기획된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매출이 좋지 않으면 늘 상품 탓을 했지만 방송의 부족함이 더 컸을 경우도 많았을 텐데 그럴 때마다 나 역시 이런 보이지 않는 원망을 들었을 테고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매번 나만 잘했다며 넘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이후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매출이 나오지 않은 방송은 내가 먼저 방송이 부족했음을 밝혔고 추후 개선점을 이야기했다. MD나 협력사 직원분들께도 스스럼없이 이번 방송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했다(그 덕에 폭풍 질타를 받은 적도 있다)
대박이 난 방송도 늘 상품과 출연진에게 공을 돌렸다. 누군가는 참 겸손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너무 상대방 듣기 좋은 말만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성공의 모든 이유가 내게 있지 않고 실패의 모든 요인은 나에게 있을 수 있다는 신념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그저 협력사분들 덕에 밥 벌어먹고 산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뿐이기에 나는 회사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PD도 아니고 나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협력사도 없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 덕에 10년 넘게 수많은 협력사와 수없이 많은 방송을 했지만 큰 잡음이 없었던 나만의 비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