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PD는 참 묘한 존재입니다. 전통적인 PD처럼 방송이라는 것을 기획하고 진행하지만 방송의 구성이나 시청률 등으로 평가받지 못합니다. 상품을 판매하는 회사에 속해있는 일원답게 모든 것은 매출로 설명되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좋게 말하면 연출과 세일즈를 동시에 하는 만능 직업이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어느 것 하나에 특화되지 않은,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PD도 아니고 완전한 세일즈맨도 아닌 홈쇼핑 PD로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 허탈함을 느끼게 됩니다.
가끔 방송이 엉망이었음에도 단지 매출이 잘 나왔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좋게 넘어가지는 상황이 있습니다.
햇병아리 시절 제주 갈치를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방송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갈치 샘플 수량을 제가 잘못 계산해서 전달하는 바람에 협력사가 실제 필요한 수량보다 매우 적은 양만 준비를 해왔습니다. 요리용으로만 쓰기도 빠듯해서 정작 중요한 제주 갈치의 크고 아름다운 실물 공개 등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무슨 귀신이 씌었는지 요리를 담당하는 스탭들과 호흡도 엉망이어서 쇼호스트가 맛있게 먹어야 할 타이밍에 익지 않은 갈치, 겉이 탄 갈치 등이 계속해서 노출되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방송에 대한 짜증으로 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고 방송 후 MD와 협력사 그리고 PD 팀장의 질책이 벌써부터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저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출은 소위 대박이 났고 예정된 방송시간도 다 못 채우고 매진이 되어버렸습니다. MD와 협력사는 매출 대박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고생했다는 말만 했습니다. 방송 준비와 방송 진행의 미숙함을 지적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팀장 역시 매출을 확인하더니 별말이 없었습니다. PD로서 하면 안 되는 기본적인 실수를 몇 개나 했지만 질책은 없었습니다. 물론 방송의 책임자로서 문책받는 것보다야 낫지만 이럴 때마다 제가 방송을 열심히 준비하나 안 하나 결국 모두 매출만 보고 방송을 평가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제가 하는 일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인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홈쇼핑 내부에서는 상품만 좋고 혜택만 좋으면 한 시간 내내 쇼호스트가 춤만 춰도 매진된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나올 만큼 아직 상품의 중요성이 큽니다. 하지만 PD의 입장에서 이 말만큼 본인의 역할에 대해 회의감을 들게 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홈쇼핑 PD는 이런 상황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방송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지만 협력사와 MD 앞에서는 상품이 좋아서 매출이 잘 나왔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은 제가 얼마나 상품에 대해 고민을 했는지, 얼마나 연출에 공을 들였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실제 해본 적도 있습니다. 돌아오는 말은 결국 그래서 매출이 얼마나 나왔냐는 것이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방송 연출에 대한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도돌이표처럼 매출과 상품이 논의의 주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방송이 핵심 비즈니스 모델이지만 그 중심은 상품인 특이한 산업'에 제 발로 들어온 홈쇼핑 PD의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