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PD와 간호사가 소개팅을 하면 생기는 일

by 지크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성사되었을까 싶지만 크리스마스 즈음에 무려 회사가 주선하고 회사에서 주최한 행사 개념으로 남자 직원들과 모 병원 간호사들이 미팅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팅을 할만한 싱싱한 나이였고 분위기 띄우는 용도(?)로 선택받은 저 역시 회사를 대표해 미팅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랜 전 일이라 기억이 많이 나지 않지만 회사에서 주선을 한 미팅이다 보니 그 미팅 특유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회식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합니다. 제 인생을 건 미팅도 아니었고 그저 재미있게 놀고 몇 명의 간호사 친구들이 생긴 것에 만족했습니다.


새해가 지나고 연락을 이어오던 간호사 한 명이 난데없이 소개팅을 주선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동료인데 참하고 정말 괜찮다는 말을 연발하며 꼭 만나보라는 이야기에 못 이긴 척 연락처를 받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소개팅 중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약속을 잡기 전까지는.


1차 시도

나 : 다음 주 방송 스케줄을 빼면 수요일 토요일 일요일 시간이 괜찮아요

그녀 : 제가 수요일 일요일이 밤 근무라.. 토요일은 저녁이고요.

나 : 그럼 그다음 주에 뵙는 걸로 하고 스케줄 나오면 다시 이야기해요~


그다음 주 2차 시도

그녀 : 다음 주는 월요일 금요일 시간이 되는 것 같아요!

나 : 헉.. 월요일은 밤 방송이 있고 금요일은 회식이 있어요.

그녀 : 흠 그럼 다음 주에 스케줄 나오면 다시 이야기해요~


그다음 주 3차 시도

나 : 화요일 수요일 촬영 가서 그때 빼고 시간 괜찮아요!

그녀 : 월, 금은 나이트고 토요일 오프라 그때 뵐까요??

(결국 토요일에 갑자기 방송이 생겨서 취소)


근무가 불규칙한 홈쇼핑 PD와 3교대 간호사의 조합은 말 그대로 만날 수가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3주째 약속만 잡고 앉아있으니 헛웃음만 나왔습니다. 점심시간에 보자, 휴가를 내자라는 이야기도 오고 갔으나 둘 다 신입에 가까운 처지였던 터라 시간 내는 것이 자유롭지가 않았습니다.


3차 시도까지 불발이 되고 네 번째로 약속을 잡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을 때였습니다. 이때 된다, 이때는 안된다가 몇 차례 오가다가 그녀가 갑자기 제안을 해왔습니다.


"내일 방송이 새벽 1시에 끝난다고요? 저 다음날 오프인데 방송 끝나고 만날래요?"


새벽 소개팅은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일정 잡기에 지친 저도 냉큼 수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살이 에이는 듯한 1월의 추운 새벽 2시에 마침내 우리는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하 10도가 넘어가는 강추위와 서로 직전까지 일을 하다 온 상황이라 멋지게 꾸미는 건 엄두도 못 냈고 소개팅하면 떠오르는 괜찮은 식당을 찾는 것도 큰 욕심이었습니다. 겨우 불이 켜져 있는 노포 술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만났다며 서로 바쁜 스케줄에 혀를 내둘렀고 아직 청춘인데 너무 업무에 찌들어 있는 것 같다며 깊이 한탄했습니다.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우리는 이게 소개팅임을 잊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1시간 정도 지나자 서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서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한병도 채 비우지 못한 술과 반도 먹지 못한 안주를 사이에 두고 청춘 남녀가 코를 박고 자고 있으니 사장님이 얼른 들어가라며 돈도 받지 않고 우리를 쫓아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제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다음날 눈을 뜨고 우리의 만남이 혹시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무렵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고 홈쇼핑은 잘 모르지만 계속 방송을 하는 PD로서 일하는 게 참 힘들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새벽에 소개팅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간호사 스케줄 근무도 만만치 않겠다는 답을 했습니다.


그 후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지만 평범한 직장인들과는 다른 근무 시간을 가진 두 사람의 어려웠던 만남은 지금도 가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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